그때, 나를 키운 감정들

돌이킬 수 없는 사랑

by 세하

내 사춘기는

몇 번의 일탈과 방황을 뒤로한 채

서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건,

사귀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집은 따뜻했다.

엄마와 아빠, 누나가 함께 웃고,

거실엔 조용한 TV 소리와 젓가락 소리가 섞여 있었으며 밥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처음 그 집에 들어갔을 땐

너무 낯설어서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조차 몰랐다.

숟가락을 드는 것도 민망했고,

사소한 질문에도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그 공기가 익숙해질수록

나는 자꾸만 그 집에 머물고 싶어졌다.


용돈을 손에 쥐여주며 “놀다 가렴” 하던 그의 엄마,

피자를 시켜 먹으며 웃고 떠들던 오후,

현관 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던 그의 아버지.


모든 장면이

오래전 우리 집을 꼭 닮아 있었다.


‘나도, 우리 집도 이랬는데.’

그리움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설렘보다 먼저 가슴을 조여왔다.


나는 그 마음을

‘사랑’이라는 말로 단정 짓기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모든 감정을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쏟아부었다.


열일곱.

우리는 어렸다.

하지만 그땐,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오랜만에 내게 깃든 따뜻함이었다.



그 사람은

따뜻한 집에서 자란 만큼 다정할 줄도 알았지만,

좋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의 말은 종종 함부로 흘러나왔고,

행동은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일곱 번쯤 헤어졌고,

그보다 조금 덜 다시 만났다.

무려,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릴 적 이별은 늘 같은 모양이었다.

그가 상처를 주고,

내가 등을 돌리면

그는 구구절절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잘못했어. 다시 돌아와 줘.”


내가 흔들리지 않을 때면

그의 가족까지 동원되었다.


“엄마, 아빠가 네가 너무 보고 싶대…”


나는 그런 말에 흔들렸고,

그렇게 또 다른 사람에게

“미안해. 아직 전 남자친구가 정리가 안 된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상처를 남겼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가끔,

누군가에게 가혹한 사람이 되었다.



그중,

유독 오래 마음에 남은 사람이 있다.


나를 많이 좋아해 주었고,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내 흔들림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람.


그는,

내 마음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걸

끝내 말로 확인받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세 달 남짓을 만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는 내게 너무 다정했다.

한 번도 날 다그친 적 없었고,

어떤 날은 내가 울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떠나겠다는 내 말 앞에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네가 너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근데…

난 널 행복하게 해 줄 기회를

얻는 것조차 너무 힘들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가 덧붙였다.


“그 사람 번호만 알려줘.

그럼… 내가 깨끗하게 물러나줄게.”


정적.


그건 분노도,

질투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진심이

더 이상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한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꺼낸 체념 같은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미안해.”라는 말만 삼킨 채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나는 다시 그 사람,

그 반복되는 재회의 상대와 함께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그 사람은 내 옆에 있었고,

낯익은 이름을 보더니

그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통화를 했다.

통화 내용의 절반은

옆에서 듣고도 믿기 힘들 만큼 차분했고,

나머지 절반은…

심장을 조여 오는 울림이었다.


“부탁 하나만 할게.

싸우지 말고, 진짜 아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다시 붙잡아놓고 또 함부로 대하면

그땐 내가 진짜, 가만 안 있을 거니까.”


그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고

아무 말 없이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새끼, 오버가 심한데? 얘 너 정말 좋아하긴 했나 봐~

근데 이 새끼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짜 잘하려고 했어.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맙다.”


나는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말의 여운이

가슴 안에서 통째로 울렸고,

그 울림은 입을 열면 울음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널 아직도 너무 사랑해.

그러니까.. 꼭, 잘 지내.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 말이

늦은 진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스무 살.

나는 또 하나의 사랑을

놓치고 나서야 배웠다.


사랑은

함께할 용기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때 떠나보낼 줄 아는 담대함도 포함된다는 걸.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그건 후회였고, 반성이었고—

무엇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

조용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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