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처럼,
식탁 위로 고요가 내려앉았다.
뜨거운 국의 김도, 숟가락 부딪는 소리도
이 집안의 숨소리 앞에선 감히 제 존재를 뽐내지 못했다.
누군가의 숨을 세고 있는 듯한 정적.
젓가락질 하나에도 망설임이 따랐다.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행위조차
기분 나쁜 소음이 되어 돌아올까 두려웠다.
어떤 날은,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귓속을 찢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숨은,
식탁 위에서도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들이쉬어지지 않았고,
밥알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지 못한 채
입안에서 굳어버리곤 했다.
입을 크게 벌려 씹는 건 금기였고,
‘맛있다’는 말도, ‘오늘 어땠어?’란 대화도 사라졌다.
우린 말 대신, 눈치를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잘 먹었습니다”라는 출구로 빠져나가곤 했다.
⸻
사춘기는 그 정적 위에
가시처럼 돋아났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기엔
세상이 너무 불공평했고,
누군가를 미워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가여웠던 아빠도,
안쓰러운 엄마도,
그저 가만히 숨 쉬던 동생조차
이 집에서 모두 사라지길 바랐다.
그리고 나조차도 먼지가 되고 싶었다.
그땐 몰랐다.
‘살아만 있게 해 달라’며 울던 내가
그토록 원망하던 이 현실을
스스로 바랄 줄이야.
⸻
나는 외로웠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는 많았다.
누구와도 잘 어울렸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선뜻
속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우리 집이 ‘불완전한 가정’이라는 말,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내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그래서 숨겼다.
우리 집을,
우리 가족을,
그리고 내 진짜 삶을.
나는 ‘불쌍한 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내 속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고,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듣는 쪽이 편해졌다.
게다가 통금.
그건 나에겐 폭력의 전조 같은 거였다.
단 5분.
5분만 늦어도,
아빠는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실제로 뺨을 맞았고,
엄마가 그걸 막아서며
또 한번 집 안이 뒤집혔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더 이상
내가 안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견뎌야 하는 공포였다.
⸻
나는 약속을 지켰다.
친구들과 재밌게 놀다가도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더 놀지 않고, 돌아왔다.
함께 있지 않고, 혼자가 되길 선택했다.
결국 가까웠던 친구들은 점점 나를 멀리했고,
내 곁엔 계속 또 다른 친구들만 남았다.
해가 지고
밤이 더 깊어질수록,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이불속에는 베개 두 개를 길게 넣어두고,
도둑처럼, 그림자처럼.
‘다녀올게요’ 대신
‘들키지 않게 해 줘요’라고 중얼이며.
그 불안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언니 없을 때마다…
잠이 안 와.
아빠가 알면… 나를 죽이려고 할 거야.”
동생의 말은
가슴에 돌멩이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그 아이의 밤을
이불속 공포로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위험한 일탈은
멈출 수 없었다.
⸻
엄마는 그 밤들 사이에서도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다.
조용히,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며
설거지를 했고,
빨래를 개고,
우리 모두가 잠든 뒤에야
눈을 붙였다.
그녀의 손엔 핏기가 없었고,
등은 늘 굽어 있었지만,
입술은 꾹 다물어져 있었다.
엄마는,
그 집의 기둥이었다.
소리 없는 천둥처럼
온 가족을 버티게 하는 존재였다.
⸻
그리고 아빠는—
움직였다.
포기한 척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무너진 듯 보였지만
다시 일어서려 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 무력함.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도
부서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아빠는 새벽을 골랐다.
어둠을 데리고
한강 고수부지를 걸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쌓인 날도,
절뚝이고,
뒤뚱이며.
그리고 언젠가
그 발걸음은
‘달리는 사람의 뒷모습’을 닮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 모든 걸 지켜봤다.
말없이.
베란다 유리 너머에서,
살며시 커튼만 걷은 채로.
흐느낌조차 들리지 않는
그녀의 눈물은
아빠에게 닿지 않았지만,
분명—
지치지 않는 기도였다.
⸻
그리고 나는…
그 눈물을 보지 않았다.
아니, 외면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그건…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어린 자기 합리화였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이 집을.
이 고요를.
이 싸움과 침묵, 불안과 의심을.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나는 그렇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도망치듯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어른이 되기를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