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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엄마의 우산

전시명과 <아들이 아빠가 되는 드로잉> 시리즈

by 콩돌이 아빠
<웃산> 24 x 40cm, 종이에 펜과 연필

한여름에도 립글로스를 발라야 하는 미국 서부는 물이 귀합니다. 매년 기록적인 가뭄이라는 뉴스를 들으며 내리쬐는 볕을 바라보았습니다. 덤벙대는 성격에 매년 우산을 두어 개씩 잃어버리는 제게 좋았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아주 이따금 내리는 비는 덤덤히 맞으며 길을 걷는 우리와는 다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콰아아아아아-"


한국의 장마철, 마치 양동이에서 물을 쏟아붓는 듯한 장마철 폭우가 지속됐습니다. 곳곳에서는 호우주의보와 침수소식이 들려오고, 탁하고 습한 지하에서 하루종일 실을 꼬아가던 저는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린이집을 하원한 콩돌이가 할머니와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칠 7시 무렵이 되어가고 저는 '하루종일 뭐 한 거지?'라는 거듭되는 질문을 하며 지하 창고를 나섭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길은 가깝지만 항상 멀게 느껴지는데, 그날따라 우산을 눌러대는 빗물의 무게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열심히 미역국에 밥을 말아 벌린 새부리 같은 아이 입에 넣어주는 할머니에게 콩돌이를 넘겨받습니다. 어차피 젖겠지만 양말과 신발을 신기고 현관을 나서는데, 음식물 쓰레기를 한 봉지 든 할머니도 함께 따라나섭니다.


"압빠, 안아저!"

"콩 돌아 비 맞아, 안으로 들어와! 엄마 빨리 가!"

"괜찮아."


땅바닥에 빗물이 내리 꽂히는 소리에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아 소리칩니다. 저는 혹여나 아들이 비를 맞을까 작은 우산을 아들에게 잔뜩 기울여줍니다. 자그마한 우산이 저의 머리만 살짝 가리고 빗물이 등을 적시기 시작하자 엄마는 자신의 우산을 기울여 애아빠가 된 아들의 등을 가려줍니다. 축축해진 한쪽 어깨와 그 어깨를 따라내려온 손에는 묵직한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들려있고 빗방울이 열심히 비닐을 두드리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연주합니다.




'전시제목과 캡션 부탁드립니다.'


미술관으로부터 전시에 관련한 일정과 필요 서류 등을 전달받았습니다. 이제껏 멋있으려 잔뜩 힘을 준 전시명들은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굳이 저랬어야 했나' 싶게 심오하며 우스꽝스러 보인 기억이 있기에 몇 개의 후보들을 정해놓고 콩돌이 엄마와 상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귀국한 후 얼마되지 않은 어느 점심 무렵이 떠올랐습니다.


콩돌이 할머니는 칭얼대는 아기에게 휘둘리며 쩔쩔매는 아들을 도우려 집을 들립니다. 콩돌이는 뭐가 불편한지 얼굴을 찌푸리며 밥숟가락을 밀어냈고 콩돌이아빠는 또 밥을 안 먹이자니 하루종일 먹은 것 없이 군것질만 할 아들이 걱정되어 난처해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들을 돌보느라 끼니를 대충 넘기는 것을 본 아빠의 엄마는 전화를 들어 중국음식을 주문합니다.


어려서부터 군말 없이 이것저것 잘 먹는 아들은 특히 자장면을 좋아했습니다. 엄마는 제 앞으로 자장면을 이리저리 비벼 젓가락을 찔러 들어 올립니다. 저는 아이 밥을 손가락만 한 숟가락에 예쁘게 정돈해 콩돌이 코 앞으로 가져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콩돌이는 밥이 싫었고, 저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자장면을 꾸역꾸역 먹습니다. 전쟁터 같은 밥상을 묵묵히 지켜보던 할머니가 먹이고 먹이는 굴레속에서 한마디 꺼냅니다.


"콩돌아, 할머니가 아빠의 엄마야. 그러니까 아빠 너무 힘들게 하면 할머니 속상해."


어려서부터 말귀가 밝던 콩돌이는 새삼 진지한 할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울먹이며 밥에게서 고개를 돌립니다. 왠지 모르게 촌극 같은 상황에 쓴웃음을 진 저는 즐겁고 배부른 점심시간을 다음으로 기약하고 할머니와 밖으로 나섰습니다.


전시제목: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 콩돌이 할머니의 손글씨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시 제목입니다.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 감사합니다. -콩돌이 아빠 드림'


우주의 거룩함에 천착했던 옛날 사람들이 거듭 파헤친 진리 끝에는 결국 허무만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그들이 돌고 돌아 도착한 '별거 아닌 평범'에 대해 기록한 몇 가지 고전이 떠올랐고, 이와같은 생각 끝에 당시 오래간 기억에 남은 그날 엄마의 한마디를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빠의 엄마가 할머니고 그런 할머니에게도 엄마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할머니였던 한 여자의 모습에 익숙한 콩돌이에게 몹시 충격적입니다.


"할머니도 엄마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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