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과 기대 속에 치른 전시는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종료됐습니다. 한창 준비기간을 거치며 액자를 걸고 오픈 1초 전까지 페인트칠을 하던 분주했던 모습, 전시가 시작한 날 저녁 찾아온 관객 중 한 분이 '이 전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용히 내뱉은 혼잣말을 아내가 전해주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감사한 말씀과 따뜻한 반응을 받은 일정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저는 약간의 공허감을 뒤로한 채 종이와 테이프로 대형 섬유작업의 포장을 준비했습니다.
"How would you transport this?" -이거 어떻게 운반하려고?-
이따금 버몬트 주에서 <그녀의 진짜 비밀> 1번을 제작했을 당시가 떠올랐습니다. 짧은 한 달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실을 꿰고 공중에서 흔들리는 나일론 줄에 아크릴 물감을 칠해 얼기설기 만든 구조물은 같은 기수의 동료 작가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칭찬이나 격려 후에는 거의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었는데, 그것은 '이동'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Possibly, I might just have to set afire." -그냥 태워버려야지, 뭐.-
반농담조로 불을 질러 없애겠다는 대답을 하며 열심히 만든 것에 연연하지 않는 쿨가이인 것처럼 굴었지만 최대한 가능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튜디오 맞은편에서 섬유와 나무로 작업을 하던 일본계 미국인 작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종이와 휴지로 작업물의 하단을 엮어서 고정해 주었고 저는 그렇게 포장법을 배워 완성품을 이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곳곳을 횡단하던 녀석은 결국 한국까지 이동하여 이번 전시에 포함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리고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포장을 진행하면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법당에서 삼백배를 드리는 시간 즈음 작업이 이뤄지면 포장은 얼추 마무리됩니다. 언젠가 다시 빛을 볼 날을 기약하며 거구의 몸집을 반이상 가라앉혀 나무틀 안에 넣어주면 이동 준비는 마무리 되지요.
<어머니의 탄생>의 포장
"영광스러운 기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같이 멋진 전시할 수 있어서 저희도 감사하지요. 다음 전시는 어떻게 되세요?"
"아직 잡힌 일정이 없답니다."
"아-. 그러세요..."
콩돌이 아빠가 너무나도 사랑한 전시장에서 온몸을 불살라 치른 개인전은 그렇게 정리되었습니다. 큰 작업을 만들며 체력이 많이 떨어졌기에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렇게 미술관을 걸어 나오는 길에는 그간 꽁꽁 얼어있던 공기와 발길을 미끄러뜨리던 눈이 봄날씨에 풀려 흩어졌습니다. 저는 그간의 일들 -미국생활을 시작하던 순간과 귀국하던 정황, 그리고 개인전 준비까지- 이 어렴풋이 떠올랐고, 한국에서 대학교 공부가 끝나고 공모전을 통해 큰 전시장의 아주 작은 부분을 맡으며 행복해하던 시기도 기억했습니다.
개인전은 작가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황홀한 순간입니다. 자신이 외면한 인격의 가장 낮은 부분을 드러내주기도 하고, 고매한 이상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중계점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처음 주어진 자신의 방 한 칸을 꾸미던 설렘같이 몇 년을 모은 그림과 입체물들을 하나씩 자리 잡아주면 그들이 작가를 에워싸고 축하를 건넵니다. 그리고 작가가 그들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그들이 작가를 설명해 줍니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기에 우리가 이렇게 드러났다'는 들릴 듯 말듯한 속삭임이 전시장 공중에 퍼져 나갑니다.
고개를 기울여 섬세한 묘사를 관찰하던 사람들, 무심히 발걸음을 옮겨 대수롭지 않게 길목을 통과하던 분들, 우연히 만난 작가에게 말을 걸던 사람들, 그리고 정제된 미술관 뒤 편에서 포장을 뜯고 페인트와 먼지를 묻히며 전시 준비를 하던 여러분들이 떠오릅니다.
안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면 자신의 한계점이 맑은 날 저만치의 산자락처럼 선명해집니다. 한때는 이름 세 글자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작가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30대가 훌쩍 지나고 아직도 '자신의 꿈'을 쫓는 무책임한 남편과 아빠가 되었습니다. 괜한 미안함에 '이번 전시가 마지막이다'라는 회유를 수도 없이했고, 이제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많이 지쳤구나'는 정도로 이 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계속 좋은 작업을 하고, 아름다운 전시장 초대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전시 일정이 비는 시기에 휑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립니다.
<친구> 16 x 23cm, 종이에 펜과 싸인펜 2023
다른 아빠들은 회사로 직장으로 떠난 어느 평일 오후, 콩돌이와 집에서 블록놀이를 합니다. 아이를 앉히고 저는 옆으로 누워 팔을 괴어 머리를 받칩니다.
"콩돌이 아빠는 작가예요."
주변분들 덕에 시간 여유가 있어 아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해서인지 콩돌이는 복잡한 말이나 생각을 해냅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읊조린 저 말에 괜히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적어도 제게 '작가'라는 말은 경외감을 줍니다. 함부로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기 민망스러운 부분이 있기에 제 소개로 감히 '작가'라는 말은 되도록 삼갑니다. 그런 제게 다른 사람도 아닌 보물 같은 아들이 불러준 그 호칭은 꽤 뭉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