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현주에게 여직원이 반기는 표정으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며칠 지내며 보니 여직원은 경리부 실장이자 이 회사의 이사이다.
“현주씨, 혹시 풀타임으로 근무할 생각 있어요? 사장님이 현주씨 일하는 거 보시더니 마음에 든다네. 현주씨 남편이 군인이라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해서 망설였는데, 1년 6개월은 다닐 수 있는 거지? 사장님 면접 봤을 때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더라고. 맞아요?”
“네. 그때 사장님께서 오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1년 6개월은 다닐 수 있어요. 풀타임 근무면 저도 좋아요.”
“일은 아마 다른 일을 하게 될 거에요. 자재관리 그런 건데 어렵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 그럼 내일 아침 회의 마치고, 정확히 이야기 해줄게요. 내일 바로 출근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 준비하고 있고요.”
“네~ 감사합니다.”
현주는 마음이 들떠 어깨가 들썩인다. 오늘은 개념 없이 전화를 받는 진상들도 밉지가 않다. 기분도 안 나쁘다.
‘역시 나는 성실해. 책임감도 강하고. 이렇게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다니. 더 열심히 해야지.’
퇴근 후 남편과 저녁 산책을 하며 현주는 신바람 박사처럼 이야기한다.
“자기야, 나 풀타임하래. 나 일 잘한다고 사장님이 풀타임 시켜준대. 내일부터 시작할 수도 있어. 아침에 나 일찍 깨워줘야 해. 출근 준비하고 기다려야 해. 아침에 애들 깨워서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서 출근 준비도 하려면 바쁘겠다, 그치?”
아침 일찍 일어난 현주는 샤워하고, 화장도 하고, 정장도 차려입는다. 어느 덧 9시. 휴대폰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음…. 왜 이렇게 연락이 늦지? 회의가 늦어지나? 무슨 일이 있나?’
결국, 12시가 넘도록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실망스러움이 컸지만, 현주는 사무실로 향한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실장이 현주에게 다가와 말한다.
“현주씨, 그게 있잖아요. 사장님이 당장은 인원 충원이 필요 없다고 하시네. 지금 하는 일만 그대로 하는 거로 해요. 알겠죠?”
‘뭐라고? 이건 뭐지? 그냥 날 떠본 거야? 짜증나게 정말….’
“네. 그럴게요. 알겠습니다.”
속상한 마음과는 달리 입으로는 세상 좋은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주의 자책이 시작된다.
‘아~ 정말 왜 김칫국부터 마셨을까? 결정도 안 된 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네. 남편한테는 뭐라고 하지? 어제 언니랑 친구한테도 자랑했는데…. 이 무슨 꼴이람….’
기분도 꿀꿀하고, 덥기도 덥고. 현주는 집에 오자마자 맥주 캔을 따서 쭉 들이킨다. 입가에 흘러내린 맥주를 손으로 닦으며
“씨팔”
아이 낳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절로 나온다.
이 작은 회사의 횡포에 맞서지 못하는 현주 자신이 부끄럽다.
‘왜 물어봤냐고! 왜 당장 일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 했냐고! 기대를 많이 했다고! 그만큼 실망도 크다고!’
그 말을 하지 못한 자신이 싫다. 한때는 바른말 잘하기로 소문난 현주였는데…. 지금은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존감만 바닥을 치는 그저 그런 40대 주부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