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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서

by 손성유

나에게 세부는 열세 살 인생 처음으로 느끼는 안온한 지상낙원이었다. 우리가 지냈던 3층짜리 대저택, 신기하게 생긴 거대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던 뒷마당, 땅콩 모양의 수영장 위를 떠다니던 붉은 플루메리아, 정원에서 다함께 아침 체조를 하고 들어오면 다이닝룸에 세팅되어있던 메이플 시럽을 두른 팬케이크와 베이컨, 그리고 버터향이 나던 스크램블. 유리컵에 가득 담겨있던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우리는 하루를 시작했고,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 모자와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필리핀 내니(nanny)들은 테이블을 돌며 수저를 세팅했다.

주말이 되면 정원에서의 아침 체조 대신 저택이 있는 빌리지 안을 가볍게 조깅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것 역시 우리와 함께 생활했던 한국인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단체로 이루어졌다. 늘 굳게 닫혀있던 대문을 열어주는 필리핀 경비원을 지나 우리는 신나서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이내 그 뜨겁게 내리쬐던 햇빛에 굴복하여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가볍게 빌리지 안을 산책했다. 산책을 하다보면 우리는 “줄리, 조심해!” 혹은 “스티븐, 앞에 봐!”와 같은 말을 심심찮게 내뱉어야만 했는데, 까만 아스팔트길 위에는 필리핀의 햇빛에 그대로 익어 굳어버린 두꺼비와 도마뱀, 그리고 뱀 따위가 꽤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사(熱死)한 두꺼비와 도마뱀, 그리고 뱀은 자동차의 바퀴에 채이고 채여 아스팔트 위에 붙은 껌처럼 납작하게 땅에 달라붙어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때의 지평선은 어땠는지 머릿속을 더듬어보지만, 애석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 빌리지를 이루고 있던 저택들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보며 어떠한 감탄사를 내질렀는지만이 기억날 뿐이다. 우리는 꽤나 해맑았고, 산책을 하면서 웃긴 표정을 짓고 또 상대방의 말을 따라하며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한번은 산책을 하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빌리지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철창 밖에서 한 무리의 필리핀 남자아이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탁구를 한다며 저택 안에 남아있겠다는 남자아이들을 뒤로 한 채 여자아이들만 아침조깅을 하러 나온 날이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던 그 아이들의 존재에 우리는 이상한 흥분감 같은 것을 가졌는데, 그것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우리 또래의 외국인을 본 것에 대한 신기함, 또래 이성을 본 데에 대한 어린 아이 특유의 숨기지 못한 들뜸, 그리고 어쩌면 그 아이들로 인해 더욱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 철창의 존재감과 그로 인한 묘한 우월감 따위의 것들이 혼합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철창은 높지 않았고, 뛰어넘으려면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그것은 마치 텔레비전과 시청자 사이의 가로막힘처럼 절대로 서로에게 닿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게 했다. 짧은 순간, 그 호기심 어린 눈들을 보며 나는 기꺼이 TV 스타처럼 행동하기로 마음먹었고, I know, I’m fucking pretty, right? (알아, 나 졸라 예쁘지?)”라며 빙그르르 돌았다. 철창 밖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필리핀 소년들과 내 옆에서 큰 소리로 키득거리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음악방송에 나오는 반짝반짝한 아이돌과 개그 프로그램에서 슬랩스틱으로 관객들을 웃기는 코미디언 그 언저리의 TV 스타처럼 행동했다고 그 순간을 회상한다.

영어캠프라는 목적에 걸맞게, 주중이면 우리는 두 명씩 짝을 지어 하루 종일 영어수업을 들어야만 했는데, 대부분의 선생님이 젊은 필리핀인이었지만, 스피킹 수업만은 배가 불룩 나온 나이든 백인 할아버지와 함께해야 했다. 영국 출신의 그 선생님은 브리티시 악센트만을 강조하였고, 꽤나 심한 백인우월주의가 있어 쌍꺼풀을 가진 나의 클래스메이트에게는 “너 눈이 아주 예쁜데, 너의 부모 중 한 명이 유러피안 출신이니?”하고 묻기도 하였다. 그 영국인 할아버지 선생님은 빨래를 담당하던, 내니들 중 유일하게 젊고 (어린아이의 눈으로 봐도)굴곡진 몸매를 자랑하던 필리핀 내니와 함께 자주 목격되었는데, 그때마다 그 내니는 교태어린 웃음을, 그 영국인 할아버지 선생님은 흐뭇하다고 표현하기에는 그렇게 따뜻하지만은 않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캠프를 감독하던 한국인 선생님들의 못마땅한 표정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실력이 된 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영국인 할아버지 선생님은 필리핀을 싫어했다. “They’re all liars. they always lie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항상 거짓말을 하지).” 필리핀의 무더운 날씨,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차를 쳐놓고 거짓말하는 필리핀인들, 심지어는 그 젊은 내니의 딱 붙는 사복차림까지 모두 그가 흉보는 필리핀의 나쁜 점에 들어갔다.

3개월의 캠프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는 캠프의 마지막을 장식할 봉사활동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다함께 부를 팝송을 연습하고, NEVER GIVE UP 따위의 희망찬 문구들을 적은 포스터를 만들어 색색깔의 색연필로 무지개를 그려 그 위를 장식하였다. 봉사를 가기 전날 저녁에는 수영을 하거나 기타 수업을 듣는 대신, 조별로 테이블에 앉아 어린아이들에게 줄 과자들을 포장하고 내니들이 가져다주는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선생님들은 그런 우리 옆에서 부모님들에게 보내줄 사진을 찍고 있었고, 우리는 수다를 떨거나 옆 테이블에 앉은 다른 조 남자아이들과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낭만을 실천하고 있었다.

외출을 할 때마다 우리는 두 대의 승합차에 나누어 타 두 대가 딱 붙어 함께 이동하였는데, 봉사를 간 날은 캠프를 감독하는 한국인 선생님 뿐 아니라 영어를 가르쳐주는 필리핀 선생님들까지 모두가 함께하여 총 세 대의 승합차가 이동하였다. 저택의 대문을 나서고 빌리지의 까만 아스팔트 위를 천천히 달리다보면, 우리의 저택 대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빌리지의 대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 앞에는 늘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채 기다란 총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몸집 큰 필리핀 가드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에게 승합차의 창문을 열고 운전수가 뭐라고 말하면 그들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운이 좋아 창가에 앉으면 나는 창문을 내리고 창밖의 냄새를 맡곤 했다. 그때의 그 냄새는 나에게 지금까지도 ‘필리핀 냄새’로 기억되고 있다. 야자수, 트럭의 삐쩍 마른 통닭, 도로 옆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사람들, 혼잡한 도로를 끼어드는 오토바이와 매연, 그리고 숨막히는 열기. 그 모든 광경은 하나의 냄새로 기억되었고, 당연히도 그 냄새는 빌리지 안에서는 전혀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선생님은 창문을 닫으라 하였다. 그 말에 창문을 닫은 채 옆에 앉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분명 도로일텐데 옆에서 톡톡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는 신호에 걸린 자동차들을 돌아다니며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난생 처음 보는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으로 숫자 1을 만들며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다. 선생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절대 창문을 열지 말라 하였고, 우리는 모두 기를 쓰고 그 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앞만 본 채 얼른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우리가 봉사를 하러 간 곳은 쓰레기 산이 있다는 한 마을이었다. 차로 30분쯤 달렸을까, 창밖에는 울창하다 못해 위압적인 열대나무들이 끝없이 늘어서있었고 미처 끝까지 닫지 못해 희미하게 열려있는 창문의 틈으로는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맡았던 냄새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을 가니 하나의 동산이 보였는데, 그 뒤로 또 하나의 동산이, 그리고 또 하나의 동산이 이어서 눈에 띄었다. 그 형형색색의 것으로 이루어진 동산의 꼭대기에 있던 철제 안락의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뒤엉켜있는 듯한 그 동산은 며칠 전 단어 수업에서 배운 anomie(아노미 상태)를 연상케 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가 우리는 차에서 내렸고, 그곳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이 열을 맞추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기념사진을 찍는 것만 같이, 어린 아이들은 앞에,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른들은 뒤에. 차에서 내린 우리는 어리둥절했고, 우리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필리핀 선생님들은 이미 설치된 배급 부스 안으로 짐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는 이내 부스 안에서 일주일 간 연습한 팝송(West Life – You Raise Me Up)을 불렀고 주민들은 다닥다닥 쭈그려 앉은 채 박수를 쳤다. 공연을 마친 뒤 우리는 곧바로 아이들에게 배급을 시작하였는데 긴 테이블 위에 우리가 전날 포장한 과자와 샌드위치 꾸러미가 올려져 있었다. 우리가 테이블 뒤에 일렬로 마치 급식 당번처럼 서 있으면, 아이들이 종이 상자를 들고 왔고 우리는 과자와 샌드위치를 하나씩 상자 안에 넣어주었다. 물건들이 가득한 테이블 위론 우리가 만든 포스터들이 유치한 색깔을 뽐내며 걸려있었다. 우리가 그린 무지개와 구름, 태양, 별 따위가 우리의 머리 위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NEVER GIVE UP -

분명 여유 있게 준비한 개수가 끝에 가니 부족했지만, 선생님들이 해결해주었다. 배식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우리는 어정쩡하게 부스 밖에 서있었는데, 봉사 내내 보이지 않던 영국인 할아버지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더니 똑같이 얼떨떨하게 있던 한 무리의 소녀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방금 나누어준 과자를 손에 들고 있었고, 우리가 다가가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라탄으로 된 챙모자와 함께 까만 선글라스를 낀 선생님은 그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들은 yes, 혹은 no와 같이 짧게 대답했고, 선생님은 그들에게 어디서 영어를 배웠냐고 물었다. “School(학교).”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아이들을 보며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See? They’re lying. They cannot afford to go to school (봤지? 얘네 거짓말하고 있어. 얘네는 학교에 못 가).”

내리쬐는 태양이 뜨거워 기절을 할 것만 같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주말 조깅이었다. 여전히 햇살은 강렬했고, 우리는 역시 천천히 빌리지 안을 걷고 있었다. 늘 보아왔던 한 저택의 대문 옆에 놓인 석고 사자상이 유달리 새하얗게 보였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껌처럼 붙은 새까만 도마뱀을 세 개쯤 발견했고, 우리는 익숙하게 그것들을 점프하여 뛰어넘었다. “야, 빨리 와서 이것 좀 봐!” 저 앞에서 선생님과 천천히 달리던 남자아이들이 무언가를 빙 둘러싼 채 우리에게 외쳤다.

그것은 두꺼비였다. 자신에게 내리꽂아지는 햇빛에 그대로 익어버린 두꺼비. 아스팔트 한가운데에 있는 그것은 아직 차에 밟히지 않아 살아있을 때의 그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빙 둘러싼 우리가 아무리 발을 구르고 위협을 하여도 굳어버린 그것은 가만히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필리핀 내니들은 차고 옆 저택의 지하에 살았다. 한번은 저택의 대리석 바닥에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혼자서만 수영을 하지 못했던 날이 있다. 그날 점심 우리는 단체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 연설 장면을 시청하였고, 나는 그것에 매우 감명을 받아 과연 긍정은 뭘까 생각하며 정원을 거닐었다. 그러다 나는 내니들의 숙소 앞까지 가게 되었고, 이미 다들 퇴근을 했는지 안에서는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마당 한 켠에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그곳에서 노란색 나시와 딱 붙는 반바지를 입은 내니가 엉덩이골까지 오는 검은색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빨랫줄에 옷을 걸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당황하여 그곳을 벗어나지도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빨래를 널 때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찰랑거렸고, 이내 일을 마치자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을 보니 플루메리아꽃들이 떨어져있었다. 뒷마당에서 아이들의 비명과 다이빙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어지럼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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