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세동 May 27. 2023

학교와 B2G 사업을 한다는 것Ⅱ

차세동의 이면


'학교와 B2G 사업을 한다는 것Ⅰ'에서

학교와의 B2G 사업의 어려운 점들을 여럿 적어내었으나

그럼에도 내가 아직 이 필드에 남아있는 이유가 있다.


비즈니스에 있어 학교와의 B2G 사업은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차세동에게 있어 학교와의 B2G 사업은 자아실현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에게 교육사업, 특히 학교와의 B2G 사업은 잘못된 방향을 지녔다.

'학교와 B2G 사업을 한다는 것Ⅰ'에서 적은 것처럼,

 필드 자체의 높은 난이도도 한몫했거니와

'특공대 만들기, 스타트업 팀빌딩'에서 적었던 것처럼,

창업가의 자아실현이 팀의 비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저지르고 있던 실수였으며 훗날에나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배웠고 반성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을 몸담은 학교와의 B2G 사업 필드에서

더 넓은 관점으로,

더 넓은 시장을 타겟으로 드디어 비즈니스다운 비즈니스를 구축해 갔다.


학교와의 B2G 사업을 하면서,

참 다양한 어른들과 사람들을 만났고

지혜로 포장되는 모난 경험들을 지나왔다.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들을 공유한다.

 



우선 구조적인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다.

학교라는 비교적 보수적인 필드는 안전성을 가장 우선시한다.

하지만 나는 늘 그 '안전성에 대한 정의'와 '안전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학교라는 필드에서 안전성이 중요한 이유는,

아이들을 만나는 만큼, 한 번의 실언이나 잘못된 메시지가 가진 파급력이 상상 이상으로 지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학교라는 비교적 보수적인 필드는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의 경력과 이력을 살핀다.

그러나 그들이 살피는 경력과 이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경력과 이력이 화려한 이들은 보통 교육이 아닌 다른 필드에 계신 분들이다.

교육으로서 화려한 경력과 이력은 공교육과 사교육으로 국한된 관념 속에서

그 밖의 것들이 인정받기 어렵기에 교육으로서 화려한 경력과 이력은 오히려

'교장선생님', 'OO학원 대표강사' 등의 타이틀일 것이다.

때문에 학교는 경력과 이력이 화려한 타 필드의 사람들을 '직업체험', '멘토링'등의 명분으로 모셔오곤 했다.

(교장선생님, 흔한 학원 강사의 강연은 학생들의 관심 밖이기에.. 물론 유명 일타 인강강사라면 모를까..!)


하지만 경력과 이력이 화려한, 다른 필드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들은

종종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종종 지나치게 정답을 주장해서

때로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 '너희들도 도전해!'

이런 언어들이 동기부여를 전달하는 시대는 최소한 내 나이대부터 지났다.

오히려 그러한 언어들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지나치게 '정답'이 있는 것 마냥 주장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청소년들은 마치 스스로가 '정답을 알면서도 수행하지 않는 미련한 인간인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커다란 거부감을 경험한다.


그들은 눈과 귀를 막고 성장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에 합리적인 이유와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정답'을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의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돈 잘 벌고 취직 잘하는 것이 성공이라는 정의가 당연했던 세상에서,

유명 유튜브나 방송에 출현하는 것이 더 큰 성공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드러난 세상이 되었다.

'당연한 정의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기존의 화려한 경력과 이력은 오히려 리스크가 된다.'


때문에 교육에서 벗어난 화려한 경력과 이력은 안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일수록 그들이 교육이나 청소년에 관해 어떠한 관점과 태도를 지녔는지

더욱 충실히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안전성을 위한다는 학교의 보수적인 명분에 적합하다.


청소년들은 깜깜한 세상에 두려워하고, 진정 공감해 줄 어른을 찾는다.

하지만 교단과 강단에 선 선생님들은 앞으로의 걱정 없이, 모범적인 삶을 살아오곤 했다.

혹은 낭만적인 방법 속에 정답을 행하곤 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아이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고민해 본다면,

그런 의미에서 학교라는 비교적 보수적인 필드에서 '안전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그들이 검증해야 할 것은 화려한 경력과 이력이 아닌,

그들이 교육과 청소년들에 대해 지닌 가치관과 태도일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대단하다는 외부 강사들로부터 상처를 사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찢어진다.


때문에 이 필드에 오랜 시간 있으며 나의 가치관과 내가 전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나의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까지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경험한다.

공교육과 사교육으로 국한된 관념 속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기타'로 분류되는 교육 경력과 이력이 잔뜩 쌓인 나에게 마련해 주신 모든 소중한 기회들을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과 경험으로 갚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내가 이 필드에 머무는 사명감이자 내가 이 현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끔 수업 영상을 돌려보면 나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할 때가 있는데 나의 글 실력으로는 담을 수 없는 벅찬 감정이다. 

다음으로는 교단과 강단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을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선생님과 강사들이 사명감 속에 그 매력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겠으나,

이 교단과 강단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분명 많다고 믿는다.


이는 활자로 다 담을 수 없는 뿌듯함에 가까운데,

동기부여를 잔뜩 얻어가는 그 눈동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끄덕임,

말하고 있는 것은 나인 것이 분명한데 오히려 내가 듣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교단과 강단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특히, 학교와 B2G 사업을 벌이며 만나는 교단은 그 매력이 증대한다.

나는 단순히 출강과 콘서트도 다수 진행하지만,

며칠, 몇 달씩 해당 학교나 기관에 머물며 아이들과 소통하고 교단에 서기도 한다.

그렇게 단기 강사로서는 형성할 수 없는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들은 가감 없고 직설적인 피드백을 남발한다.

그들은 주저함 없이 엎드리고, 망설임 없이 눈과 귀를 닫는다.

나의 실력이 여실히 까발려지는 무대가 교단이다.


나는 적어도,

내 실력에 아직은 자신이 있기에,

그러한 무대를 더욱 즐기는 편이다.

내가 위기교실, 선생님들이 포기한 무기력 교실들에 자신감 있게 다가가는 이유이다.


사실 실력이라고 표현하지만,

실력이라는 단어 안에는 나만의 아픔을 담고 있다.

우울증을 경험하고 불안장애를 경험한 것은 '선생님'으로서 모순일 수 있으나

이 경험들은 나만이 공감할 수 있는 분명한 영역을 만들어낸다.

아이들이 전해주는 높은 만족도와 효과 지표들은 이러한 영역의 존재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이곳은 나의 실력을 발휘하는, 자아실현의 무대로서 제격이다.




마지막은 사람들이다.

물론 나쁜 사람들도 정말 많다.


'선생님 저도 대학을 다 가보네요.'에서 적었던 것처럼,

경력과 이력을 화려하게 내세우지 않는 나에게 시작도 전에 잔인한 무시와 괄시를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나의 철학이나 생각, 태도에는 관심 따위 가지지 않는 구조적이고도 모순적인 억울함이었다.

그렇게 기회를 잃어버린 채 나의 모든 것이 '무모함과 리스크'로 포장되고 있노라면

나는 억울해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스무 살에 뛰어든 학교와의 B2G 사업이라는 필드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사건들을 만들어 내곤 했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아이들이 원하는 것. 아이들에게 이로운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는

계획과 방침 속에 유기당하는 스스로가 초라했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그리고 그 실력은 늘 아이들이 증명해 주었기에,

나의 무대나 프로그램, 수개월 동안 진행되는 이른바 시즌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지곤 했다.


나에게 사과하는 이들도,

자신의 행태에 부끄러워하는 이들도,

언제 그랬냐며 180도 태도를 바꾸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자신의 경력과 이력 중심의 안목을 맹신하며,

나의 실력마저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이유가 늘 '아이들'은 아니었다.

아프거나 속상하지는 않았으나 안타까웠다.

결국 몇몇 아이들은 그 사람 곁을 벗어날 수 없고,

그 사람과의 불가항력적인 관계 속에 학교생활을 보낼 테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부디 좋은 선생님이기를 비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지만,

나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정말 큰 재앙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운'으로 결정되는 현장이 안쓰럽긴 하다.


하지만 알지 않은가,

이러한 학교와 청소년 현장 속에도 분명히 '좋은 사람'이 존재한다.


내가 이 필드에 계속 머무는 이유들은 이분들의 존재 덕분이 가장 클 텐데,

이러한 분들은 정말 '아이들을 위해서 산다.'

이러한 분들은 곧 나의 좋은 동료가 되곤 했다.

함께 아이들이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갔다.


모든 결정과 기준의 우선순위가 '아이들'이라는 그 본질을 지키고 있는 선생님들을 만나면

나는 이 절망적인 현실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된다.

이 작은 희망이 나에게는 너무나 간절해서 나는 이 작은 희망을 아직도 놓지 못한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했다.

잔인한 현장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스스로가 방향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우연히 한 번은 친한 선생님께 이 현장에서 얻은 내 마음속 깊숙한 자상을 공유했다.


그 선생님께서는 청소년 기관에 종사하고 계신 선생님이셨는데 

늘 해당 기관이나 해당 기관과 연계된 학교, 기타 관련 다른 기관까지.

모든 무대, 나에게 기회를 마련해주시고는 했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아팠고 힘겹게 붙잡고 있는 작은 희망을 차라리 포기하고 싶었다.

다들 정녕 '정답'을 아는 것인지 나에게 '오답'이라 하는 것 같았다.

갈피를 잃어버린 내가 나의 실력조차 의심할 때 그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세동아, 내가 너를 이곳저곳 자꾸 부르는 건, 다른 게 아니야."

"나는 너가 아니라, 너가 아이들을 대하는 신념이나 태도를 백 프로 믿기 때문에 너를 부르는 거야."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학교와의 B2G 사업은 나에게 자아실현이었으며,

비즈니스를 선택한 나에게는 '낭만'이었다.

또 한 번 낭만을 쫓아보는 나였다.

이전 16화 학교와 B2G 사업을 한다는 것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