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아픈데 크리스마스 리스를 살 순 없잖아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오히려 크리스마스에 진심이 된 케이스에 속한다. 기독교 집안이 아니고, 부모님이 그런 주제를 아마 모르셨을 거라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적이 없는 탓일까. 다른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받는 건 당연히 좋고,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트리 구경도 즐기며 이 시즌 즈음에 넷플릭스에 쏟아지는 어설픈 크리스마스 영화들도 많이 본다. 하지만 부모님(정확히는 아빠)의 잔소리가 신경 쓰여서 집을 장식하지는 못했다. 고작 내 침대 위에 부직포 가랜드를 붙이고 싸구려 탁상 트리에 전구를 감으며 소중한 분이 추천해 주신 캐럴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사는 집은 내가 '산' 집이기도 하다! 집을 대차게 꾸미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생활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설치한 리빙 관련 앱에서 주기적으로 크리스마스 관련 물품을 탐색했다. 벽에 패브릭 포스터도 걸고 싶었고, 현관문 안쪽에 크리스마스 리스도 달고 싶었다. 장식이 너무 단조로운 탁상 트리도 더 예쁜 거로 바꾸었으면 했다. 식탁보나 테이블 매트도 빨간색이나 초록색으로 하나 마련하고 싶고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무드등도 갖고 싶었다. 그렇게 장바구니에 하나씩 물건들이 쌓였다.
내가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크리스마스는 딱 15일이 남았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그 물건들을 하나도 사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폭설을 겪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지구의 상태를 악화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환경론자였다. 집안의 콘센트는 다 뽑고 다녔고 물을 절약해서 써야 한다는 관념이 박혀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신었던 검은색 레깅스를 저번달까지 신었으며(위험한 곳에 구멍이 난 걸 발견하고 버렸다) 고등학생 시절 스쿨룩스에서 산 카디건을 아직도 입고 다닌다. 내가 짧은 머리를 유지하는 데에는 샴푸와 물이 적게 든다는 이유도 있으며, 사무실에서는 핸드 타월을 쓰지 않기 위해 손수건을 걸어두고 있다.
물론 개인의 노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어 지구는 여전히 멸망하는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여기서 내가 불필요한 소비와 쓰레기를 낳을 뿐인 행위를 한다면 결국 그 부작용은 내가 겪을 것 같았다. 끔찍한 더위와 폭우가 오갔던 이번 여름은 너무나 힘들었다. 대폭설이 왔던 날에는 아직 지리를 완전히 익히지 못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려다 힘에 부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아마도 2024년 지금의 지구가 내년보다 멀쩡한 지구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꾸민 2만 원짜리 크리스마스 리스는 정말 사고 싶었다. 그래서 그건 가장 마지막에 장바구니에서 지워졌다. 비록 다이소에서 10만 원을 썼다 한들 크리스마스 리스가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용품은 아니니까. 멸망 앞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과 장식품을 사는 건 다르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건 엄마와 맛있는 저녁을 먹는 일로 대신해야겠다. 밥은 먹어야 하고, 크리스마스를 멋지게 지내고 싶은 만큼 엄마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 말이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