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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Oct 29. 2024

아찔했던 제1회 런던김치디너

없다. M&S 푸드 진열대에 배추가 없다. 한여름 더위가 기승일 때 한국 마트 풍경이 이랬을까. 하긴 내가 나이브했다. 런던 일요일 마트는 오후 6시면 문을 닫는다. 재고를 많이 남길 수 없으니 일요일에는 물건을 많이 갖다놓지도 않는 것 같다. 내가 빨리 물량을 확보했어야 했다. 오후 5시에 김치를 같이 담그기로 했는데 4시가 넘어서야 마트에 갔으니 지나치게 느긋했다.


주재료인 배추가 없다면 김치 디너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빨리 수습하자. 다행히 배터시 파워스테이션에는 한국 마트 '오세요'가 있다. 가보자.


주말 한국 마트는 북새통이다. 요즘에는 한국인 혹은 아시아인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한국에 대한 관심을 실감한다. 하여튼 나는 채소 매대로 직행한다. 아...없다. 여기도 배추가 없다. 이걸 어쩐다. 일단 포장 김치를 두 봉지 사자. 끝내 배추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할 겸, 내가 만든 김치가 처절하게 실패하는 위험에도 대비할 겸. 언제나 플랜B는 준비해둬야 한다. 5.16파운드. 9천 원쯤?


아내에게 근처 마트를 검색해달라고 부탁한다. 세인즈버리나 테스코 같은 곳들이 있긴 있다. 하지만 내가 거기까지 갔다가 끝내 재료를 못 구하면? 너무 위험해진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뿐이다. 안 되겠다. 이쯤 되면 구조 신호를 보내야 한다. 부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다. 상황을 수습하자.


"오마이갓. 나 지금 마트에 왔는데 주재료인 배추가 없어! 누구든 가까운 식료품 매장에 좀 들러줄 수 있어?"


다행히 오늘 장소를 제공하기로 한 C가 곧바로 반응한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재료를 자신이 챙길 수 있다면서 알려달라고 간청했었다. 한국 음식이니 식재료도 내가 다 챙기겠다고 걱정 말라고 했었는데...당일에 갑자기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 하지만 도리가 없다.


"남편한테 물어볼게. S는 지금 웨이트로즈에 가 있거든. 비빔밥에 넣을 재료들, 버섯과 소고기, 당근 등등은 이미 구해두었어. 배추는 몇 포기 사야 할까?"


오늘 모임에는 인도네시아인 부부, 이집트인, 캐나다인 부부가 온다. 아이들까지 14명인가. 김치를 담가서 같이 먹기도 하고 한 병씩 들려 보내야 한다. 겉절이를 한다 치고, 5포기로 하자.


"C, 정말 고마워. 5포기면 돼. 혹시 white mooli가 있다면 하나만 사 줘. 뒤늦게 SOS 보내서 미안해."


물리는 무 대용으로 먹을 만하다. 김치 양념에도 넣고 생채도 만들자. 무생채 같은 가벼운 김치도 있단다 외국인들아. 더구나 오늘 저녁은 비빔밥을 하기로 했으니 잘 어울린다.


나는 다시 M&S Food로 돌아간다. 파와 양파와 마늘과 생강을 조금 산다. 5.89파운드. 만 원쯤 되겠다.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C와 S네 집으로 간다. 아직 다른 가족들은 도착 전이다. 로어 그라운드에 있는 주방에 가서 준비를 시작한다. 이 집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지하 1층, 지상 3층 주택이다. 영국의 집들이 흔히 그렇듯 지하에 주방과 식당이 있고 1층은 거실, 2층부터 가족들 각자 공간이 있는 구조다.


곧 마트에 갔던 S와 큰딸이 돌아온다. 이 집은 애가 셋인데 막내딸이 우리집 딸과 동급생이다. 큰딸은 피어싱에다 징 박힌 검정색 청바지까지 록스피릿이 충만한 청소년이다. 그런데도 아빠와 같이 장을 보러 다니는 거 보면 아이를 잘 키웠구나. 


S 부녀가 구해온 배추는 상태가 나쁘지 않다. 그대로 씻어서 준비를 시작한다. 채소 씻는 건 이 집 아이들이 담당한다. 애들이 착하군. 일단 배추 3포기를 씻어다오. 파도 씻어서 다듬고. 난 양념을 만들겠다.


해외 생활 하면서도 김치를 포기할 수 없는 토종 한국인이 보여주는 김치 담그기 쇼가 시작된다. 오늘 이 자리는 C와 S 부부가 강력하게 요청해서 마련됐다. 김치를 좋아한다는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재료를 사다가 김치를 만들어도 보고 마트에서 사서 먹어보기도 하는데 도통 만족이 안 되었다. 진짜 한국인들이 먹는 김치가 몹시도 궁금했는데, 마침 학교에 한국인 학생이 들어왔다. 심지어 막내딸과 같은 반이다!


그리고 중동과 아시아에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주로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배우들 이름이 입에서 줄줄 나온다. 최근엔 흑백요리사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했다. 너희들이 보는 그런 전문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평범한 한국인이 먹는 간편 버전 김치를 보여줄게. 재료도 런던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이야. 그래야 너희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한국에서는 염장한 앤초비나 새우가 들어가고, 겨울에 담그는 김치에는 생굴을 잔뜩 넣기도 해. 그러면 정말 맛있어지거든. 해안 도시에서는 아예 진짜 물고기를 넣기도 한다고. 그런 걸 여기 런던에서 할 수는 없으니까. 아쉬운 대로 우리는 구하기 쉬운 재료들로 비슷한 맛을 내자.


재료는 마트에서 사온 김치키트. 여기에 감칠맛을 위해 액젓 적당량을 넣어준다. 맛과 모양을 위해 파와 마늘, 생강, 당근을 썰어 넣는다. 보조 셰프로 주방을 지키는 남편 S는 칼질이 서툴다. 불안하다. "김치 재료에는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아. 칼 조심해." "양념에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빨간색은 이미 충분해. 피를 넣을 필요는 없어." 안 되겠다. 결국 내가 칼을 빼앗아 들었다. 


씻어서 잘라둔 배추와 이 양념을 섞어주기만 하면 끝. 샐러드 스타일의 간편 버전 김치다. 너희도 쉽게 만들 수 있어. 오. 와우. 임프레시브. 룩스 굿. 땡큐 셰프. 온갖 감탄사를 들으며 김치를 완성한다. 큰 볼에 비빈 김치 전체를 대형 접시에 담아서 저녁 먹을 테이블에 옮긴다. 테이블 위에서 어슷 썬 파와 깨를 뿌려서 모양을 좀 낸다.


세 볼을 더 비벼서 유리병에 담는다. 각자 집에 갈 때 한 병씩 들고 가렴. 하루이틀 숙성하면 아마 더 맛있을 거야. 그러라고 액젓을 넣었어.


피곤해질 때쯤, 노동주가 제공된다. 막걸리가 아니라 마가리타. 이 집 아저씨 S가 마침 좋은 데킬라가 남았다며 만들어주는데 오호 괜찮다. 고추를 으깨서 살짝 매운맛을 넣었는데 아주 훌륭했다. "그래 김치 디너니까 오늘은 뭐든 매운 맛이 조금은 들어가야 한다고!" 다들 적당히 유쾌해졌다.


이 집 큰 딸, 그 피어싱 하고 징 박힌 진을 입은 채 열심히 주방 일을 돕는, 내 마음에 쏙 든 아이가 비건이란다. 마침 아내가 산 김치양념 키트는 비건식이다. 그럼 아저씨가 너를 위해서 비건 김치를 따로 만들어줄게. 일단 양념 만드는 그릇과 김치 비비는 볼을 깨끗이 씻어줘. 거기엔 피시소스가 묻었어.


액젓 없이 양념을 새로 만들고 남겨둔 배추 한 통을 씻어서 자른다. 김치를 비벼준다. 유리병에 담는다. 헷갈리지 않게 따로 라벨을 붙여줘. 비건 김치라고.


그 사이 이 집 큰아들은 비빔밥에 얹어 먹을 소고기를 준비한다. 다진 고기 같은 걸 준비하면 된다고 내가 얘기를 못 했구나. 고기 굽는 냄새가 고소해서 돌아보니 스테이크가 익고 있다. 허허. 하긴 뭐 김장날 바비큐를 하기도 하니까. 그러려니 하자.


딸은 쌀밥을 짓는다. 쌀을 10분째 씻는 걸 내가 말렸다. 그동안 밥 지을 때는 항상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었단다. 안 그래도 돼. 적당히 씻으렴.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라이스 쿠커를 들고 오는 건데. 이들은 냄비밥 짓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하긴 압력솥이 아니면 뭐 어떤가. 우리가 밥에 지나치게 예민한 거겠다. 내버려둔다.


버섯을 볶아낸다. 중국풍 소스를 살짝 넣었는데 맛은 나쁘지 않다. 한국식 비빔밥 재료에선 점점 더 거리가 생기지만. 이 딸은 또 두부를 깍둑썰어서 밀가루에 굴리더니 튀기듯 구워낸다. 아마 살짝 바삭한 느낌도 나겠다. 비빔밥 고명이라기보다는 그냥 사이드로 먹자. 


비빔밥은 내가 많이 개입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 김치 5통 만드느라 이미 너무 피곤하다. 어느 순간 보니 당근은 길게 썰어서 또 중국풍 소스를 살짝 뿌려서 샐러드 비슷한 모양으로 상에 올라와 있다. 흠. 정체를 알 수 없으나 맛은 나쁘지 않겠다.


나는 숙주를 데친 뒤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간단히 나물을 만든다. 비빔밤엔 이런 나물이 잔뜩 올라가야 하는 법이다. 가져간 양념 고추장과 참기름도 꺼낸다. 이걸 넣어서 밥과 여러 재료를 섞어서 먹는 거야. 취향껏.

비빔밥이라기엔 낯선 상차림. 괜찮다. 이건 김치 디너다.

김치 디너엔 무슨 술이 어울리느냐, 역시 소주 아니냐, 넌 몇 병 마시느냐 같은 시덥잖은 대화가 오간다. 인도네시안 아빠는 코리안 식당에서 바비큐를 먹으며 네 병인가를 곁들였다가 다음날 무척 고생했다고 했다. 그래 우린 대학생이 아니니까. 마셔도 한 병 정도만 해야 할 거야. S는 와인을 한 병 꺼내서 곁들인다. 

시작은 아찔했지만 화기애애한 식사였다. 비빔밥 같지 않은 비빔밥, 샐러드 스타일 김치(겉절이를 이렇게 소개해도 좋을까?)와 마트에서 사온 맛김치로 완성한 김치 디너. 그리고 아이들 학교와 여행과 런던 도로에서 하는 운전의 어려움과 세컨더리 스쿨 시험과 우리 가족의 내년에 올 변화까지 온갖 이야기들이 오갔다. 오후 5시부터 밤 9시 20분까지 장장 4시간 넘는 대장정.


한국에 대한 관심, 한국 음식에 대한 호기심, 한국인들을 향한 선망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한국은 먹힌다. 지금 런던에선 '한국'을 키워드로 하면 뭘 해도 될 것 같다.


우리 다음 모임은 어느 나라 음식으로 하게 될까? 마무리하며 내가 물었지만 아무도 명확하게 대답을 안 한다. 음 그래. 다들 현명하구나? 제2회 런던김치디너는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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