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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Nov 02. 2024

끝 없는 석회질 전쟁

첼시의 비앤비 빌런 A네 집에서 지낸 기간은 우리 가족에게 여러 깊은 인상을 남겼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22 그 중 하나가 전기 주전자였다.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외출했다 돌아오면 우리는 주구장창 따뜻한 차와 커피를 마시거나 라면물을 올리곤 했다.


그런데 주전자를 쓸 수가 없었다. 우리 눈에 주방 주전자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분명 집주인 A도 꽤 잦은 빈도로 물을 끓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바닥에 불쾌한 색깔의 뭔가가 엉겨붙어 있었다. 우리 눈엔 분명 '썩은' 상태였다.


이제는 안다. 수돗물의 석회질이 가라앉은 흔적이다. 보기엔 분명 좋지 않지만 위생상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도 적다. 아무튼 그 때 우린 그 편리한 전기 주전자 대신, 매번 냄비에 물을 끓였다.


비듬이 사라지지 않는다

빌런에게서 도망쳐서 새 집에 온 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머리 감을 때 거품이 잘 안 난다. 곧 우리 어깨에 비듬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두피도 좀 가렵고 머릿결은 뻣뻣하다. 그렇잖아도 굵은 내 옆머리 머리칼은 아예 수평으로 자라는 것 같다.


아 이거 런던 물이 그렇다더니. 경수 속 미네랄 성분이 피부에 남으면 피부의 수분이 더 빨리 날아가게 한다. 건조하다 못해 푸석푸석해지는 내 피부...


런던을 포함한 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지하수는 석회암과 백악질이 풍부한 지층을 통과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을 흡수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온들이 물에 섞이면서 '경수'(hard water)가 된다.


런던 물의 경도는 특히 높다. 경도는 물 속에 포함된 탄산칼슘 농도로 주로 표시하는데 런던 수돗물은 300ppm가까이 된다. 서울은? 50에서 80 수준이다. 엄청난 차이다.

London: 250–300 ppm (very hard)

Bristol: 280 ppm (very hard)

Manchester: 60–90 ppm (moderate to slightly hard)

Edinburgh: 10–50 ppm (soft)

Birmingham: 100–200 ppm (moderate to hard)


한국인, 특히 여성들이 보여주는 깨끗하다 못해 투명하고 맑은 피부는 이곳 사람들에게도 경탄의 대상이다. 타고난 측면이 있고 한국 화장품의 기여도 있겠으나, 난 물의 차이가 정말 크다고 생각한다. 평생 석회질을 얼굴에 바르고 다니는 이곳 사람들 피부가 좋기는 힘들겠다.

금발이라 비듬이 잘 안 보여서 그럴까? 이곳 아이들은 매일 머리를 감지 않는다. 이미지 baz_baziah

건강에는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모양이다. 런더너들도 탭워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신다. 칼슘이나 마그네슘은 뼈의 재료가 될 테니 그 자체로 나쁘기야 하겠나. 다만, 지나치면 신장에 결석이 생길 수 있다. 우리 몸 속 정수기 기능을 하는 게 신장인데, 필터에 찌꺼기가 쌓이고 쌓이다가 결석이 되면 엄청나게 아프다고 한다.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다...


샤워헤드를 바꿨다

아무튼 런던의 센물은 피부와 머릿결에는 분명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했느냐. 샤워헤드를 바꿨다. 딸 아이가 친구 L 집에서 수영을 하고(그렇다. 집에 수영장이 있다) 샤워하면서 보고 온 제품이다.


수돗물이 두 가지 동글동글 돌 사이를 통과한 뒤 비타민C 블록을 조금씩 녹이면서 나오게 되어 있다. 석회질 제거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르겠다. 물을 처음 틀면 노오랗게 오줌 색깔 비타민 물이 나온다.


비타민 샤워헤드를 쓴 뒤로 우리 가족의 비듬과 머릿결 문제는 개선되었다. 서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낫기는 확실히 낫다.


그래도 부족하자, 나는 비듬 샴푸를 파리에 간 김에 유명하다는 몽주약국(?)에서 사다가 쓰고 있다. 평소에는 일반 샴푸를 쓰다가 두피 상태가 안 좋아진다 싶으면 사흘 정도 비듬샴푸를 쓰는 식이다. 도움이 된다.


경수는 피부를 건조하게 하는만큼, 샤워 후에는 보습에 신경 쓰는 편이 좋다.


브리타 워터저그의 구원

마시는 물은 브리타 정수기로 걸러서 마신다. 영국 내 시장 점유율 60% 정도에 이른다는, 국민 정수기다. 거의 집집마다 주방에 하나씩은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30파운드 안팎이면 물통과 필터까지 한 세트를 갖출 수 있다. 필터는 소모품인데 개당 5파운드 안팎이면 산다. 경제적이다.


쓰기도 얼마나 쉬운가. 수돗물을 물통에 받아두면 필터를 통과해 졸졸 내려간다. 아직 걸러지지 않은 물이 통에 남아 있어도 물을 따를 때 흘러나오지 않는다. 디자이너들 참 신통방통도 하지.


필터는 매월 1일에 바꾸는 걸 원칙으로 한다. 4주에 한 번씩 바꾸라고 권고하고 있어서다. 런던 물은 경도가 높은 편이니까 더 자주 바꿔야 할까?


주전자는 구연산으로

우리 전기 주전자 바닥에도 어느 순간부터 석회질이 앉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서야 우린 빌런 A가 지저분한 건 아니었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흉을 봤다고 미안해 했다. 센물을 끓이면 물속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이 탄산염과 들러붙으면서 주전자 내벽에 쌓이게 된다나.


찌꺼기가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으니 바닥에 단단히 붙어만 있어도 빌런 네처럼 뭐 그냥저냥 쓰겠는데. 석회질 조각은 물을 끓이면 떨어져나온다. 주전자 안에 연한 갈색이나 회색 조각이 떠다니는 광경을 보면 아무리 좋은 차로 '런던 포그'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56를 만들어도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찾아보면 다 방법은 있다. 마트에 가면 limescale remover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주로 구연산 같은 약한 산성 물질들이라고 한다.


주전자에 적당량을 붓고 끓이면 마법이 일어난다. 쌓여 있던 석회질이 슬슬 녹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지랑이가 피는 것처럼 석회질 주변에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신기하다.


"마, 이게 화학 아입니꺼!" (경상도 분들이 보면 이상한 어색한 사투리겠지? 용서해주세요.)


하도 신기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물어봤더니. 긁어다 붙이면 표기도 이상하게 되네. 아무튼 저 식을 보고도 난 읽는 방법도 모른다. 까막눈이 따로 없네. 문송합니다.


산과 탄산염의 반응: 구연산과 칼슘 탄산염이 만나면 칼슘이온과 이산화탄소, 물이 생성됩니다. CaCO3 + 2C6H8O7 → Ca2+ + H2O + CO2 + C6H5O73


반응 후에 이산화탄소도 생긴다는 걸 보면 기포로 보글거리는 게 이산화탄소였나보다.


매일 대여섯 잔씩 커피 내리느라 과로사 지경인 커피머신도 함께 목욕재개. 물 탱크 안에다가 리무버 넣고 커피 내리는 것처럼 여러번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기계 내부까지 씻어내주면 끝이다.


됐다 싶어서 커피를 내렸다가 맛이 이상해서 몇 번 더 헹궈내긴 했다. 귀찮아도 커피 맛이 더 좋아졌으려니 생각한다. 좋아졌겠지 머.


식세기는 별도 세정제로

식세기 청소에 쓰는 세정제에는 주전자용 석회질 제거제보다 더 강력한 구연산, 황산, 젖산 또는 황산염 기반 성분이 포함된다. 식기세척기 내부는 석회질 뿐 아니라 비누 찌꺼기, 음식물 찌꺼기까지 쌓이니까. 강려크해야 한다.


계면활성제(비누 성분)나 물때 제거제가 포함되기도 한다. 고온 세척을 통해 석회질과 기름기를 동시에 제거해서 식기세척기 내부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개념이다.


주전자용 석회질 제거제와 주성분이 같다고 해도 다른 용도로 교차 사용하거나 혼용하면 좋을 리 없겠다. 적어도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설거지한 식기나 컵에 물기가 묻은 채로 마르면 석회질이 남아 얼룩이 생긴다. 식세기 세정제를 쓰면 아마도 이런 얼룩도 덜 생기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른다. 우린 식세기 거의 안 써서.


서울의 맑은 물로 뽀득뽀득 깨끗하게 씻고 뜨끈한 방 바닥에 까슬하고 포근한 이불을 깔고 덥고 눕는 상상을 한다. 11월, 런던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흩어지고 있다.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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