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나는 친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대도시의 외곽,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시내 중고등학교로 통학 할 때는 통학 자체가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그 흔한 학원도 거의 다녀본 적이 없다.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어울릴 여지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러고도 나쁘지 않은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 후에는 또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가서 이날 이때까지 버텨냈으니 신기한 일이다. 친구들과 부대끼며 깎이고 다듬어지지 못한 탓에 성질머리가 강퍅한 채로 40대를 보내고 있는 점은 함정이겠으나.
뜬금없는 고백을 늘어놓는 이유는 딸 아이 친구들 생일 파티를 보며 느끼는 문화 충격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밑밥을 까는 거다. 런던에서도 부촌이라는 캔싱턴 첼시에 사는 아이들의 생일파티는 입이 떡 벌어진다. 서울에서도 다들 그렇게 해요,하는 분들이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신기하다. 10살짜리 애들 생일 파티를 이렇게나 한다고?
빌리는 장소도 가지각색이다.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러니까 연초에 처음 초대받은 친구 생일파티는 일종의 골프 게임장이었다. https://www.puttshack.com/uk 사이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냥 애들 오락실 수준이 아니다. 음료와 음식이 제공되는 본격 실내 놀이 시설이다. 펍도 갖추고 있어서 아재들도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이집트계 바레인인 그 아이는 남녀 아이들을 고루 초대했다. 골프 게임을 죽 한 바퀴 돈 다음에 그 안에서 음식을 먹으며 파티를 했다. 남자 아이들까지 부르는 경우는 뭔가 몸을 쓰는 프로그램을 넣어주는 게 좋은가보다.
비용은 생일파티 패키지 가격이 아이 한 명 당 35파운드 정도. 생일 케이크는 물론 별도로 주문해야 한다. 그때 대충 잡아 아이들이 적어도 10명에 부모들도 몇 명 갔었다. 성인들을 위한 맥주나 음식은 따로 주문하고 계산했을 거다.
그때 나는 영어 울렁증 정도가 아니라 위가 통째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로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아이만 파티장에 놓고 도망치듯 나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물론 집에 쥐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긴 했으나. 런던 생활 극초반의 흑역사.
오늘 간 생일파티는 실내 암벽등반장에서 1부 행사가 진행됐다. https://www.citybouldering.co.uk/ 여기도 흔한 아이들 놀이터가 아니다. 성인을 위한 강습도 진행되는 전문 실내 암벽이다. 아이들 생일파티 패키지가 있고 그걸 이용하는 형식이었다.
A Fun Walls Party for up to 8 kids costs £270.
A Fun Walls Party for up to 14 kids costs £420
남녀 4명씩 모두 8명이 초대 받았고. 생일인 아이 부모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택시로 태워서 암벽까지 데려가고 안내를 도맡았다. 거기서 간단한 음료와 스낵을 먹으면서 암벽을 탄 뒤,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서 피자와 음료와 여러 달달구리 간식을 먹으며 로어그라운드부터 세컨 플로어까지, 집안에서 뒷마당까지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어울리는 프로그램이다.
오늘 아이를 데리러 가봤더니 집이 멋졌다. 남아공 출신이라는 아이 친구 아빠, 유전학 박사 출신이라는 엄마가 직접 의뢰해서 지은 집이라나.
건축비 200만 파운드짜리. 볕이 집안 구석구석 잘 스며들도록 꼼꼼하게 설계한 게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즐기는 세 식구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노래방 반주기 등을 동원해서 즐기는 공간도 있고. 좋아 보였지만 이 글에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집안 곳곳은 가렌드 같은 걸로 꾸며뒀다. 그냥 집에 초대하는 게 아니라 파티를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한 게 분명해보였다. 아이들 데리러 오는 부모들을 위해 맥주와 스파클링와인 같은 가벼운 주류와 핑거푸드도 챙겨뒀다. 우린 로어그라운드에 있는 대형 테이블 주변에 둘러서서 영어면접평가스탠딩 파티를 30분 가량 즐겼다.
전에 초대받은 또다른 생일파티는 집에서 시작했다. 인도인 아빠와 일본계 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생일날. 집은 어마어마하게 꾸몄다. 그라운드 플로어 풍선 장식을 업체를 불러서 했는데 장식값만 수십만 원이었다고 했던가.
초대는 여자 아이들만 했다. 아이들이 하룻밤 자면서 놀게 하는, 이른바 슬립오버 개념이었다. 물론 아이들을 요 깔고 바닥에서 재우는 개념은 없으니 침대가 필요하다. 어쩌려고 하나 했더니 바닥에 놓는 매트리스와 이불을 아이들 숫자만큼 모두 새로 샀다.
다음날 아침에 아이 데리러 갔다가 난데없는 매트리스까지 선물 받아서 가져왔다. 아이는 지금도 종종 그 매트리스에서 잔다.
음식은 대부분 배달 시킨다. 오늘 그 남아공 아이도 피자를 배달시킨 것 같았다. '김장도 한다'던 그 태국인 엄마는 한국 음식도 시켰던가.
파티는 집에서 하더라도 종일 안에서 지지고 볶지 않고 밖에 나가는 프로그램을 짰다. 대형 쇼핑몰인 웨스트필드나 첼시 복판 킹스로드 가게들을 도는 일정.
각자 부모가 허용하는 적정 금액을 가져오도록 미리 안내한 뒤에 그 범위 안에서 쇼핑을 하는 방식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화장품 가게를 들락거렸다. 10살 아이들이 벌써 무슨 짓인가 싶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제1회 런던김치디너가 열렸던 그 집 딸도 생일파티는 집에서 했다. 집을 꾸미고 음식을 배달시키고 아이들은 집안에 있는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보드게임을 하고. 집에 스크린골프가 있다고 했던가 골프연습장이 있다고 했던가. 뭐 아무튼 그랬지만 아마 가장 익숙하고 평범한(?) 홈파티 아니었나 싶다.
집안에 수영장이 있다는 부유한 집 아이 생일파티도 집에서 열린다고 한다. 집이 리조트 수준이니 그래도 될 텐데 외부 프로그램도 준비해뒀나보다. 그 집에서 하룻밤 자는 방식으로 한다고 하니까 10살 아가씨들이 야간에 무슨 풀파티를 하려나 싶기도 하다.
영국인 아빠와 호주인 엄마는 또 얼마나 화려하게 집을 꾸미고 준비를 해뒀을까? 요리사가 집에 있으니 거기선 배달음식도 안 먹겠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파티를 해버리니까 가져갈 선물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받는 만큼 줘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아이들 성향에 따라 학용품이 되기도, 한국산 문구류가 되기도, 각종 스킨케어 제품이 되기도 한다.
가격대만큼 모양새도, 크기도, 포장도, 심지어 담아서 주는 쇼핑백도 신경 써서 골라야 한다. 파티 초대도 초대장을 주는 방식으로 제법 모양을 갖추니까 애들 일이라고 허투루 할 수가 없게 된다.
다만 하나 다행이라면 한국에 대한 관심과 호감도가 워낙에 올라가고 있어서 메이드인 코리아거나 한국어가 쓰인 모종의 제품이면 일단 좀 먹고 들어간다는 정도.
이쯤 되니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다. 우리 아이 생일은 12월 초. 임박해 있다. 이 찬란하고도 어마무시한 아이들 생일파티의 규모를 우리가 따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랑이가 찢어질 판이다.
그 좋은 집에 사는 아이들을 이 좁아터진 그라운드플로어 원베드룸 플랏으로 불러들일 수도 없고. 어딘가를 빌려서 해야 한다.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 색다르고 재미있는 뭔가가.
촌놈인 나는 살면서 내 생일이고 가족 생일이고 이렇게까지 신경 써본 일이 거의 없다. 그건 내 사정이고. 핵인싸 재질인 우리집 따님 생일을 대충 넘길 수 없다. 런던에, 그것도 캔싱턴에 들어와 살면서 별별 고민을 다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