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다. 분명 많이 춥지 않은데 이상하게 추운 런던의 겨울(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14)이 온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김치를 대량으로 담가 저장하듯, 런던에서는 차를 준비해야겠다. 오락가락 비에 종잡을 수 없는 바람에 시달리다 집에 들어오면 뭔가 따뜻한 걸 마셔줘야 한다. 커피도 좋고 숭늉도 좋겠으나, 그래도 런던이니 차를 마시자.
물론 런더너들도 커피를 즐기지만 차 사랑은 유별나다. 영국인들이 1년간 마시는 홍차가 100억 잔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도 런던에 와서 산 거의 유일한 가전제품이 드롱기 커피머신일 정도로 커피 중독자지만, 차도 즐기게 됐다
카페에서 차를 주문하면 반드시 "위드 밀크?"하고 묻는다. 특히 차를 많이 즐겨오지 않은 초심자들은 고민하지 말고 '예스 플리즈'라고 하자. 초딩 입맛에는 쓰고 텁텁하고 맛 없는 차라고 해도, 우유를 섞고 설탕까지 조금 넣어주면 꽤 괜찮은 음료가 된다.
가장 대중적인 차다. 어떤 차를 주로 마십니까,하고 영국인들에게 물으면 열 명 중 네다섯 명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꼽는다고 한다. 비교적 가격도 착한 편이다.
맛은 진하고 묵직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주로 아침식사와 함께 마시는 티로 널리 애용되면서 무려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라는 국가대표급 명칭이 굳어졌다.
영국인 형님 J의 어머니인 90대 할머니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워킹 클래스의 차'라고 설명했다. 찾아보니 실제로 원래 노동 계급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홍차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아침 식사와 함께 강한 블랙 티를 마시는 식습관이 보편화되었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의 강한 풍미는 우유나 설탕을 넣어도 유지되기 때문에, 아침 식사와 함께 에너지를 보충하는 음료로 적합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특히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전반에 걸쳐 아침 식사의 필수 음료로 자리 잡았다.
여러 티를 섞어서 만드는 차로, 브랜드에 따라 맛이 다르다. 주로 인도의 아삼, 스리랑카의 실론,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산 홍차 등 여러가지를 섞는데 배합 비율이 제각각인 탓이다.
영국 총리였던 찰스 그레이(Charles Grey) 백작의 이름을 따서 ‘얼그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차는 19세기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 이후로 고유의 향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다. 베르가모트(bergamot) 오일이 가미된 독특한 향이 특징이다.
베르가모트 향이 우유와 만나면 은은한 감귤 향이 돋아 독특한 풍미를 즐길 수 있다. 패션잡지스럽게 쓰자면 "플로랄하고 프루티하며 프레시하다". 우유가 얼그레이의 향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주어 부담 없이 마시기 좋다.
특히 겨울철에는 '런던 포그(London Fog)'라는 형태로도 많이 소비한다. 얼그레이 티에 따뜻한 우유와 바닐라 시럽을 추가한 밀크티의 별명이다.
왜 하필 런던포그냐. 얼그레이와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의 색깔이 런던의 흐린 겨울 하늘, 안개 낀 날씨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지는 우울하기 짝이 없지만 좋게좋게 보자. 분위기 있고 몽환적이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적당히 달콤하고 감칠맛이 있다.
인도의 아삼 지역에서 생산되는 홍차. 보통 블렌딩의 기본 재료로 많이 사용되지만 이 차를 따로 파는 찻집들도 있다. 강한 몰트 향과 깊은 색감이 특징이어서 꼭 이 차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아삼은 인도에서 독립적으로 개발된 최초의 상업적 홍차 품종 중 하나라고 한다. 원산지 인증까지 받은 고품질 제품은 꽤나 비싸다.
아삼은 추운 겨울철의 오후나 저녁에 편안하게 즐기기 좋다. 아삼 특유의 깊고 풍부한 맛은 오래 남아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인도 다즐링 지역에서 재배된 차. 특정 시기에 수확된 다즐링은 고급 홍차로 분류되고 영국 상류층과 티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독특하고 풍부한 향과 약한 떫은 맛이 있다. ‘차의 샴페인’이라고도 불린다. 주로 가볍게, 우유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즐링은 비교적 비싼 편으로, 고급 다즐링 티는 특히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 일반 소비량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얼그레이보다 물론 적다.
트와이닝스(Twinings)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블렌드. 얼그레이의 향이 부담스럽다는 의견에 맞추어 대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맛이나 향이 얼그레이와 비슷하지만, 오렌지와 레몬 껍질이 추가되어 더 밝고 상쾌한 맛을 낸다. 우리 가족의 런던 첫 홍차였는데, 아주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 있다.
자, 그럼 이런 차를 어디에 가서 살 것인가. 런던에선 동네 마트에 가도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차를 살 수 있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티백 형태로도 많이 나와 있다. 초심자들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싸고 좋은 게 어디 그리 쉽게 찾아지랴. 전문점에 가서 시음도 해보고 내 취향에 맞는 차를 골라보는 것도 좋겠다. 귀국을 앞두고는 선물용으로 가져가도 좋다. 짐가방 무게에도 별 부담이 없으니까.
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초의 차 전문점 중 하나. 런던 도심 한가운데 있어서 시내 여행하다가 접근하기 좋다. (216 Strand, Temple, London WC2R 1AP)
가격도 비교적 합리적이다. 일반적으로 £5-£10 사이에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얼그레이 등의 클래식 블렌드를 구매할 수 있다.
전문 직원들이 친절하게 맞이해서 차를 추천해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마스터 클래스를 예약해서 내 취향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나겠다. https://twinings.co.uk/pages/tea-masterclass-tasting-experience
영국 왕실 인증을 받은 고급 티와 럭셔리 식료품점. 무려 1707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건물 외벽에 매달린 시계부터 우아하고 장식적이어서 시선을 끝다.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티 블렌드를 경험할 수 있다. 꼭 차를 사지 않더라도 시내 여행하다가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혹은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러도 좋다.
물론 가격대는 다소 높은 편이다. 대부분의 티가 £10-£25 정도 하고 다즐링, 아삼, 그리고 프리미엄 블렌드는 £30 이상에 판매되기도 한다.
특별한 품질의 고급 홍차를 찾는다면 최적의 장소다. 퍼스트 플로어에 올라가면 찻잔 같은 다양한 티웨어를 파는데 예쁜 디자인에 한 번 놀라고 엄청난 가격에 두 번 놀라게 된다. 욕심껏 지른다면 다음달 카드값에도 한번 더 놀랄 수도 있겠다. 예쁜 본차이나 세트를 사서 차 맛과 향에 매번 놀라고 싶기는 하다.
층층마다 차를 마시거나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여러 카페/레스토랑이 있다. 로어 그라운드에는 푸드홀이 있어서 괜찮은 음식으로 가볍게 한끼 때우기에도 나쁘지 않다. https://www.fortnumandmason.com/piccadilly
1886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차 전문점. 다양한 블렌딩과 과일차, 허브차로 유명하다. 매장에서 샘플을 시음할 수 있다. 밀크티와 잘 어울리는 블랙 티가 많고, 가성비 좋은 티도 다양하게 갖췄다.
가격대는 보통 £5-£15 사이로, 선택의 폭이 넓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아삼 등은 £5-£10 정도로 구매할 수 있다.
차 전문점이라고 콧대 높게 차만 파는 것도 아니다. 커피도 있고 핫초코도 판다. 여기 핫초코도 아주 맛있었다.
구글에 검색해보면 곳곳에 매장이 많은데 여행자들은 주로 코벤트가든이나 채링크로스점을 많이 찾는 것 같다.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고품질의 홍차를 찾는다면 트와이닝스와 휘타드 오브 첼시, 고급스러운 제품을 찾는다면 포트넘 앤 메이슨이 낫다.
티백이든 잎차든 사 왔는가? 우유도 준비 됐고? 그렇다면 찻잔이 필요하다. 머그도 상관 없지만 아무래도...티의 맛을 농축시켜서 향을 더 잘 느끼게 해주고 차 온도도 잘 지킨다는, 작고 얕고 얇은 본차이나 잔 세트까지 갖춘다면 당신의 티 라이프가 풍성해질 것이다. 은행 잔고는 어이없게 가벼워지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