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아침, 블랙캡을 호출한다. 차를 타야만 하는 상황이면 우리 가족은 주로 우버나 볼트를 이용한다. 상대적으로 저렴해서다. 블랙캡은 '진짜 택시' '정식 택시'다. 택시 면허가 차에 붙어 있고 운전자의 신원도 비교적 확실하다. 그런만큼 조금 비싼 게 아니라 차이가 꽤 난다.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공간들로 예를 들어보자. 캔싱턴궁 카페(https://www.royalparks.org.uk/visit/parks/kensington-gardens/orangery)에서 애프터눈티를 마시고 바비칸센터에 공연을 보러 간다고 가정하자. 우버는 보통 15에서 20파운드, 블랙캡은 30에서 40파운드. 하지만 많게는 6명까지 탈 수 있으니까 일행이 많으면 오히려 좋은 선택일 수 있다.
우리 세 가족이 왜 그 날은 블랙캡이었느냐. 중요한 날이니까. 아이가 첫 중학교 입시를 치른다.싸다고 우버나 볼트 불러놓고 차가 잡히지 않아서 발을 동동 구를 수 없다. 기껏 배정된 차가 지저분하거나, 주로 중동계 젊은이인 운전자가 주구장창 전화통화를 하면서 거칠게 운전하는 꼴을 볼 수 없다.
기대했던 대로 블랙캡은 깔끔하다. 운전자는 친절하다. 하지만 시험날 아침이다. 마지막까지 안심이 안 되는지 10살 아이는 좌불안석이다. 단어라도 외우겠다면서 자료를 꺼내는데 눈에 들어오겠나. 차라리 긴장을 좀 풀자. 농담이나 주고 받으면서. "go for it!" "하뚜이따!" 아이는 학교 선생님들이 알려줬다는 긴장을 풀어주는 호흡법도 따라해본다.
긴장해서 막 서두르지 말자. 문제를 다 풀 필요도 없다. 물론 모든 문제를 풀어서 다 맞으면 최고겠으나, 40문제 중 30문제만 풀어도 괜찮다. 푼 문제들이 거의 다 맞는다면 말이다.
아이들 수준에 따라서 문제 난도를 조정하는 adaptive test라면 첫 다섯 문제를 특히 신중하게 풀어야 한다. 여기서 정답 비율이 낮으면 그 뒤로 정답을 다 맞춰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쉬운 문제만 주니까. 첫 5문제 10문제까지를 특히 잘 풀자.
블랙캡 운전자도 아이가 시험을 치르러 가는 걸 알아차리고 인사를 건넨다. 나는 아이를 위해 기도해달라고도 했다. 길이 좀 막히는 것 같자 지름길로 가로지른다. 블랙캡 운전자가 되려면 채링크로스 반경 6마일 안의 10만 개 지점을 다 외우고 도로 2만5천 개를 손금 들여다보듯 해야 한다더니. 과연 그 흔한 네비게이션도 없이 척척 길을 찾는다. 덕분에 10시 반 정시 도착.
어? 시험장 앞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동급생 20명 중에서 아마 가장 공부 잘 하는 친구. 너도 이 학교 지원했다더니 딱 만났네? 유전학 박사라는 그 친구 엄마도 다소 긴장한 표정이다. 괜찮아 얘들아 다 잘 될 거야.
이 학교는 사흘에 걸쳐서 1차 시험을 치른다. 아이가 3일동안 시험을 본다는 얘기는 다행히 아니다. 지원자를 세 그룹으로 나눠서 각각 1시간씩 시험을 보게 한다. 우리 아이들은 첫날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
이 학교가 보는 시험은 CEM.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개발한 시험 모형인가보다. https://www.cem.org/admissions#:~:text=CEM%20Select%3A%20This%20is%20a,7%2C%208%2C%209%20%2610. 반복 학습보다는 이해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라고 한다.
컴퓨터 기반 테스트다. 시험을 위한 컴퓨터는 학교에서 준비한다. 응시자는 수학 문제 풀이용 필기구만 가져가면 된다. 종이도 학교에서 준비해준다. 목이 탈 수 있으니 물통도 챙겨가자.
고사장 건물 입구에서 아이 이름만 확인하고 들여보낸다. 그 흔한 사진 대조도 안 한다. 여기가 느슨한가 한국이 지나치게 빡빡한가?
시험 시간은 10시 45분부터 딱 1시간. 응시생 45명이 앉은 고사장에 감독관이 10명 넘게 들어갔다고 했다. 시험 감독은 또 깐깐하게 하나보다. 사소한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태세다.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에게 인쇄물을 하나씩 나눠준다. 살펴보니 주변에 있는 카페 같은 시설들 정리해둔 자료다. 1시간동안 헤매지 말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라고. 꼼꼼하기도 하지. "이거 봐 얘들아. 여기 진짜 좋은 학교라니까?" 아이 친구 엄마가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기뻐한다.
아이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부모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아닌 게 아니라 아이가 치르는 첫 '진짜 시험'이긴 하다. 지금 다니는 사립학교에 오려고도 시험을 치긴 했는데 아무래도 약식이었다.
당락이 뚜렷이 갈리는, 아마도 경쟁률이 꽤 높을 시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가 잘 이겨내기를 바란다. 런던에 온지 10개월차인 아이가 10년동안 여기 산 아이들과 경쟁하는 거다. 결과보다는 준비 과정에서 아이가 성장하는 걸 보고 싶었다. 아이는 압박감을 이겨내며 준비해왔다.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여기 근처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대. 난 거기 가보려고." 딸 친구 엄마인 유전학 박사님은 제갈길을 가시고 우리 부부는 근처 카페로 간다.
1시간 뒤, 다시 시험장 입구에 부모들이 모였다. 다들 긴장하고 있다. 웃는 얼굴은 없다.
아이들이 나온다. 선생님과 부모가 눈을 마주쳐야 아이를 내보낸다. 10살 아이들은 아직은 보호자 없이 혼자 거리로 나갈 수 없다. 한명한명 내보내야 하니까 시간이 걸리지만 안전하다.
웃는다! 나오는 아이 표정이 밝다. 다행이다. 아이 손에는 학교에서 준비한 쿠키와 엽서 한장이 들려 있다. 고생했으니 당 충전하라고 쿠키 하나. 그리고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행운을 빈다는 류의 인사가 담긴 엽서 한 장. 신경 쓰는구나 싶어서 고맙다.
"고생 많았다 우리 딸! 어땠어? 많이 어렵지 않았어?"
"생각보다 괜찮았어. 내가 어려워하는 단어 문제 같은 거는 안 나와서 다행이었어."
"와 대단하다. 수학은 어땠어?"
"시간을 다 써서 풀었어. 많이 어렵지는 않았어."
"추론은?"
"언어추론은 문제를 다 풀지 못했어. 근데 그건 다 푼 아이가 없을 것 같아. 괜찮아."
아이 얼굴에는 시험 전 긴장은 온데간데없다. 자신감 뿜뿜. 보기 좋다. 잘 될 것만 같다. 아니 또 잘 안 되면 어떠한가. 런던에 와서 1년도 안 된 아이가 셀렉티브 스쿨 시험을 보고 저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거 자체가 대단하다. 분명 크게 성장하고 있다.
시험도 봤는데 지금 다니는 학교에 굳이 오후에 가지는 말자. 어차피 금요일 오후에 이 학교는 공부를 안 한다...첫 입시 뒤풀이를 거하게 하자. 시험날엔 자고로 잘 먹고 재미나게 놀아줘야 한다.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중국음식점에 가서 딤섬을 양껏 시켜서 푸짐하게 먹었다. 식사 후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리고 우리 가족이 이사하게 될지도 모를 배터시파워스테이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차도 마시고 쇼핑도 하고 장도 보고. 고생했다 우리 딸.
오전에 시험을 치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선생님들이 궁금해한다.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라하는 진학 담당 선생님 J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시험 잘 봤느냐고, 슈퍼 데이였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주말 편안히 쉬며 보내라고,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도 했다. 고맙다. 아마 시험 본 아이들 모두에게 비슷한 질문과 응원을 해줬겠으나. 마음이 따뜻하다.
물론 입시는 이게 끝이 아니다. 이 학교의 1차시험 합격자 발표는 12월 중순. 2차 시험은 '크리에이티브 라이팅'을 포함한 영어와 '문제 해결력'을 측정하는 수학 시험으로 1월 중순에 치른다. 별도로 면접 평가가 3차 전형으로 진행된다. 음악장학금을 신청한다면 따로 오디션을 봐야 한다. 최종 합격자 통보는 2월 중순이다.
우린 4개 학교에 지원했다. 이제 첫 학교 첫 시험 하나 끝난 거다. 학교에 따라 1차 시험 형태가 다르다. 2차, 3차 시험 설계도 제각각이다.
다른 한 학교는 ISEB 시험 결과로 1차 전형을 갈음한다. 시험 날짜는 25, 26일 이틀로 확정되어 있다.
2개 학교는 런던 컨소티움http://london11plus.co.uk/ 소속이다. 12월 3일 오전 9시 정각에 시작되는 시험 결과를 공유한다.
긴 승부다. 지치지 말자. 웃으면서 가자 딸아. 과정 자체가 아름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