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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Nov 23. 2024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

먹고 싶다...사진은 글 내용과 아무 상관 없음

이것은 과학 이야기다. 또한 영상 촬영 기법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또한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 영상 많이들 보셨을 거다. 꽃망울이 꿈틀거리다가 이윽고 꽃잎이 펼쳐지면서 활짝 피는 장면. 터파기부터 시작해서 뚝딱뚝딱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 절절 끓는 것 같은 바다로 떨어지는 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상.


촬영 기법 중 미속, 혹은 완속이나 간헐 촬영이라고 하는 기법이다. 영어로는 타임랩스라고 한다.


보통 우리가 보는 영상은 1초당 60장씩 촬영한 이미지를 연결해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활동사진이라는 용어는 사실 직관적이다.


미속은 이 촬영 속도를 늦추는 거다. 촬영 간격을 늘린다고 하는 게 더 적당하려나. 1초에 60장을 계속 찍는 대신 3초에 한번, 혹은 5초에 한번을 찍는다.


5초에 한번 찍은 영상을 우리가 익숙한 방식의 동영상으로 만들면? 초당 60장이 필요하니까 300초를 1초로 압축하게 된다. 긴 시간을 짧은 영상에 압축해서 볼 수 있게 되는 원리다. (나는 영상 전문가는 아니다. 혹시 설명에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아 주시길 부탁드림미다.)


좋은 미속 영상을 얻으려면 카메라를 고정하고, 뭔가 변화하는 대상을 지켜보면 된다. 너무 미미한 변화는 포착하기 어렵거나 아주 긴 시간동안 촬영해야 한다. 해넘이를 보여주려면 어느 산등성이나 건물 옥상, 베란다 같은 곳에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고정하기만 하면 된다. 건물 올라가는 걸 찍으려면 맞은편 건물 옥상에 카메라를 고정하면 되겠다.


카메라를 고정하고 변화하는 대상을 찍는다. 이게 미속 촬영의 전부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 기능을 완전히 반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영상 전문가들이야 다들 아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개념이 완전히 전복되는 경험이었다.


비비씨에서 지금 방송하는 다큐 중에 솔라시스템, 태양계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다. 브라이언 콕스 교수를 프리젠터로 내세워서 태양계의 여러 재미난 특징을 보여주는 과학 다큐다.


런던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bbc 다큐를 언제든 iplayer로 볼 수 있다는 거다. 브라이언 아재는 록스타 같은 독특한 매력으로, 또 과학적 원리를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지적 자극으로 늘 즐거움을 준다.


아무튼 Series 1의 5화 'Strange Worlds'편에서 미속 기능을 다르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카메라는 단순 삼각대가 아니라 astronomical mount, 적도의에 올린다. 국어 사전엔 이렇게 쓰여 있다. "지구의 자전축에 평행인 회전축과 그에 직각인 회전축을 가진 천체 관측 기계. 일주 운동을 하는 천체를 언제든지 관측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어인데도 어렵다. 

삼각대 위에 가만히 있는 카메라의 초점은 하늘의 한 점을 계속 찍는다. 화면 속 저 카메라는 태양에 고정했다. 결과는?


빙글빙글 도는 화면을 얻는다.  지구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빙글빙글 돌면서 우주 공간을 비행하는 중이니 카메라가 가만히 있지만 움직인다. 지구 자전축과 함께.

단단한 지구, 지각판 위에 발 딛고 있는 우리의 경험은 머리 위로 태양이 움직이고 달이 뜨고 지고 별이 우리 주변을 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을 속이는 그 움직임을 제거하면 비로소 하늘 아래 돌고 있는 지구가 보인다.

 

지금도 천동설을 믿는 분들도 있을텐데, 이런 영상을 보고는 뭐라고 하실지도 궁금하다.


우리는 보통 내 위치와 입장을 고정하고 상대를 바라본다. 나는 상수고 상대는 변수다. 상대가 변해야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움직일 생각, 내가 변하거나 최소한 양보하겠다는 고려는 뒷전이다. 그러면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비판한다.


늘 카메라를 고정해둔 채 피사체의 변화, 이동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던 타임랩스 기능을 완전히 반대로 사용한 다큐 영상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틀렸다면? 내가 오해하고 있다면? 내가 무지하다면?


때로 바라보는 방향,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보는 연습만으로도 '사고 실험'만으로도 우리는 한 단계 진화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생각의 방향을 바꿔본다는 것.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불필요한 다툼은 많이 줄어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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