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오후, 런던대 직원인 C를 펍에서 만났다. 190센티미터 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영국 남자. 내가 가진 영국 남자들 인상은 '푸들 같다'. 자연스러운 곱슬머리. 때로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기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 물론 이 표정은 친해져야 나온다. 특히나 글루미하기 짝이 없는 겨울날 영국인들 얼굴에선 표정이 실종된다. 아무튼 그 푸들 같은 C는 "오늘이 올해 겨울 첫날인가봐!"라고 호들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춥다. 11월 20일 런던의 아침기온이 0도로 내려갔다. 긴 가을의 끝. 아직은 만추라고 하자. 겨울이 시작되면 너무 우울하니까. 아직 남은 나뭇잎들을 죄다 떨어뜨릴 기세로 제법 거칠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반짝 추위가 시작되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자연을 좀 즐겨줘야겠다. 런던 도심에서 걷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좀 외곽으로 나가자.
행선지는 서리 힐(Surrey Hills). 런던에서 남동쪽, 대략 7시 방향에 있는 전원 지역이다. 제인 오스틴은 서리에서 휴가를 보냈고 , 셜록 홈즈의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은 10년간 살았다. EM 포스터는 에빙거 해머에서 20년 넘게 거주했다. 비틀즈의 전설 링고 스타와 블루스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도 서리에서 살았다. 왜? 아름다우니까.
서리는 국립공원에 준하는 보호를 받는 지역이다. https://www.visitsurrey.com/explore/the-surrey-hills-aonb/ 내셔널 트러스트도 이 지역의 상당부분을 보전한다. 걷는 길도 잘 조성되어 있다. https://www.visitsurrey.com/listing/the-surrey-hills-national-landscape/19653101/
무려 새벽 6시에 캔싱턴에서 출발했다. 동 트는 시간의 서리힐을 즐겨줘야 한다. 운전까지 도맡는 일행 C가 따뜻한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서 건넨다. 세상에 이 새벽에 나오면서 커피를 내려오다니. 커피맛도 훌륭하지만 마음이 더 고맙다.
가는 길에 일찍 문을 연 동네 빵집에 들렀다. 나는 뱅오쇼콜라, 일행은 플레인 크루아상 하나씩으로 당을 충전한다. 물론 빵은 내가 산다. 빵집 할매는 아침부터 기운이 넘친다. "킵 웜!" 하얀 입김을 불며 나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응원 한마디가 따뜻하다.
6시 40분쯤부터 걷기 시작한다. 서리힐은 야트막한 동산이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산책객들은 주로 개와 함께 걷는다. 목줄을 채우지 않은 개도 많다. 대형견이어도 그렇다. 영국 와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개들마저 자유롭고 행복해보인다는 것. 마음껏 자연을 누비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도심 가게들도 개들을 위해 입구 주변에 물그릇을 내놓는 곳이 많다. 스트레스가 적은 탓인지 교육을 잘 받아서인지 사랑 받아서인지 사납게 짖거나 으르렁대는 친구들도 거의 못 봤다.
"다 백인이지요?" 함께 걷는 C가 묻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한 시간쯤 걷는 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은 예외없이 백인들이다. "런던 도심엔 이제 영국인들, 원래 살던 백인들이 거의 빠져 나간 것 같습니다. 너무 비싸서 살기 힘들기도 하고요. 집을 팔고, 혹은 런던 집은 세 주고 이런 교외로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런던 외곽의 이런 좋은 전원지역 작은 도시들이 어쩌면 진짜 영국인지도 모릅니다. 런던은 여행자와 세계에서 온 사업가나 유학생들로 너무 번잡해요. 여기 사는 분들은 내가 '첼시에 삽니다'라고 이야기하면 딱하다는 표정으로 봅니다."
런던을 아주 떠나지 않더라도 런던의 어퍼미들 클래스, 중산층 중에서도 여유 있는 계층부터는 주말은 당연히 교외로 나가서 보낸다. 경제적 여유 있는 런던 사람들은 교외에도 집이 한 채씩 더 있다. 주중에 도시에서 받은 스트레스, 특히 대기오염이 심각하던 시절에는 폐속 깊이 찌든 나쁜 공기를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캔싱턴 사립학교 친구들도 주말이면 코츠월드 등등에 있는 집에 간다고 한다. 물론 아이들은 매우 지루해하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화다.
런던의 최저기온은 0도라지만 서리의 들녘은 기온이 좀더 낮은 모양이다. 영하 2,3도쯤? 목장에 웃자란 풀잎에 허옇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물웅덩이에는 살얼음이 끼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막 떠오르는 햇살에 빛난다. 아름답다. 사진을 찍으려다가 그냥 눈에만 담기로 한다. 어차피 똥손이라 예쁘게 찍지도 못한다.
1시간 반쯤 걸었을까. 야트막한 어느 정상에 오른다. 산이라기보다는 동산이다. 전혀 힘들지 않다. 그저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몸이 따뜻해진다. 경관은 기가 막히다. "멀리 보이는 능선 너머가 브라이튼입니다. 영국의 남해안이요." 어제 오후까지 비가 내린 뒤, 시야가 맑다. 브라이튼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상상만 하기로 한다.
정상에 있는 벤치는 철제 의자다. 엉덩이가 의자에 달라붙을 것 같다. 엄살이다. 달걀을 하나씩 까먹고, 당근 스틱을 좀 주워먹고,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 곧 다시 걷는다. 딱히 쉬기도 무안할 정도로 힘이 들지 않으니까.
숲 속에 웬 표지판이 있다. 이 지역에 2차대전 때 스파이를 교육시키는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표지판에는 스파이로 적 후방에 침투했던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써 있다. 누구는 생존했고 누구는 전사했다. 더러 생사가 끝내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외딴 숲 속에서 암호와 무기를 다루고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때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방법을 배웠을 그들. 참혹한 일이지만 사진 속 그들은 마냥 젊고 싱그럽다.
대장정의 마무리는 작은 마을 시어(Shere). 영화 The Holidays의 일부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St James's Church는 무려 14세기에 지은 영국성공회 교회로, 크리스틴 카펜터라는 여성이 죽을 때까지 교회 건물에 붙여 만든 작은 방에 갇힌 채 살았던 곳이다. https://maps.app.goo.gl/XpwsSWZe3artnvF69?g_st=com.google.maps.preview.copy
처음엔 자발적이었다고 해도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들 갇힌 삶이 어떻게 만족스럽기만 했겠나. 크리스틴은 한차례 탈출했다가 다시 붙들려와서 죽을때까지 초소형 오두막 수준의 작은 감옥을 벗어나지 못했다. https://www.getsurrey.co.uk/news/nostalgia/surrey-church-virgin-lived-inside-25244677 끔찍한 역사가 무색하게, 교회는 작고 아름다웠다. 건축적으로 웅장하거나 하지는 않다.
여정의 마무리는 동네 다방에서 차 한잔. 11시쯤 힐리스 티숍 https://www.hillysteashop.com/에서 갓 구운 스콘과 밀크티로 피로를 풀었다. 물론 이 좋은 경험을 하게 해준 일행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내가 대접한다.
차 맛이 기가 막힌 건 차가 좋아서일까 아니면 티팟과 찻잔 덕분일까? 영국인 형님 J는 이 사진을 보더니 "아 정말 적당한 본차이나 찻잔이군. 저런 데 차를 따라 마셔야 한다고."라고 했다. 내가 이러다 아마 박싱데이를 즈음하야 티세트를 지르고 말지 싶다.
스콘을 빚던 할매는 홈페이지 사진 속 그 분이다. "평일엔 내가 종류별로 50~60개 정도씩 만들어. 주말에는 100개씩 만들고." 우리가 차를 마시는 사이 갓 구워낸 치즈 스콘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진열대로 나온다. 갓 구웠으니 진짜 맛있겠지? @@ 치즈 스콘의 상태를 확인한 할매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쿨하게 퇴근했다.
C는 안 되겠다며 스콘을 좀 포장해가자고 한다. 하긴 같이 사는 파트너 R이 좋아하겠다. 나는 플레인, 치즈, 프루트 3종을 하나씩. 일행 C는 플레인과 치즈 두 가지만 담는다. 스콘값은 실랑이 끝에 C가 냈다.
따뜻한 스콘도 차도 좋았지만 특히 잼이 기가 막혔다. 한 병 사들고 오지 않은 걸 후회하는 중이다. 맨 오른쪽에 꽃 꽂은 초코 뭉텅이도 참 맛있었다. 대중교통을 타고서라도 다시 가기로 결심은 했는데...갈 수 있겠지?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C는 근처에 와이너리가 있다고 했다. "최근에 프랑스 와이너리들이 영국 땅을 여기저기 사들이는 모양입니다. 토질이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적당한 곳이 꽤 있거든요. 기후는 안 맞았는데 요즘 기후변화가 점점 더 빨라지면서 영국이 포도 재배하기에는 적합해지나봅니다. 특히 샴페인을 만들기 위한 품종이 잘 자란다나 그랬던 것 같아요." 기후위기의 역설.
https://www.denbies.co.uk/ 과연 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제법 멋스럽게 지은 건물 안에는 와인과 각종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있고 음식점도 있다. 우린 화이트와인 한 병씩을 사들고 나왔다. 와인도 C가 사겠다고 해서 제일 싼 걸 골랐다. 내가 사면 좀더 좋은 걸 골랐을텐데...
지금 글 쓰면서 홀짝이는 중인데 아주 맑고 가볍다. 식전주 혹은 낮술(!) 용도로 좋겠다. 라벨에 보니 와인투어와 테이스팅 프로그램도 있는 모양이다. 런던에서 하루 날 잡아 다녀오기에 적당할 것 같다. 관심 있는 분들은 홈페이지를 열어보시길.
캔싱턴에 돌아오니 오후 1시. 딱 좋다. 차가 있고 시간이 있는 지인이 내게 이렇게 마음을 써주니 런던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 대도시, 문화예술이 있는 곳, 건축이 아름다운 곳만이 아니라 자연이 아름다운 곳, 걷기 맞춤한 곳, 정겨운 시골마을도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