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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못하는 유학생

29만원짜리 강펀치

by K 엔젤


새벽 1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셀핍 점수가 나왔습니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손끝이 살짝 떨린다.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는데, 머리는 초고속으로 깨어난다.

후다닥 셀핍 사이트에 들어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타다닥 친다.
로그인.

결과창이 뜨자 숨이 잠깐 멎는다.

리스닝 8점.
오예.
라이팅 7점. 스피킹 7점.
생각보다 잘 나왔네? 긴장이 풀리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 이 정도면 괜찮지.”

그리고… 마지막 칸을 보는 순간, 내 손가락이 멈췄다.

리딩… 6점?

……….?

잠깐. 6점이라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혹시 8을 잘못 본 건 아닐까.
아니, 이건 분명 6이다.
차라리 시험장에서 멘붕이라도 했으면 납득이라도 하지.
근데 별로 어렵지도 않았는데?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잘못 본 걸 거야.”
다시 한번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응.
너 6점 받았어. ^^

솔직히, 10개 내외로 틀린다고 쳐도 최소 9점은 나오겠지 했다.
근데 6점?
6점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잖아.

리딩만 7점이었으면 참 예쁘게 균형 잡혔을 텐데.
리스닝 8, 라이팅 7, 스피킹 7, 그리고… 리딩 6.
마치 4명이 찍은 단체사진에서 한 명만 눈 감은 기분이다.

도대체 몇 개를 틀린 걸까.
시험장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고친 문제들…
아니, 그때 그냥 안 고쳤으면 더 높았을까?
그렇게 세 개만 맞았어도, 아니 일곱 개만 틀렸어도, 최소한 이 점수는 아니었을 텐데.

더 답답한 건 무슨 문제를 틀렸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마치 범인은 잡지 못했는데 벌은 내가 대신 받는 느낌.

시험이라는 건 늘 그렇다.
잘 봤다 싶으면 점수는 낮고,
망쳤다 싶으면 생각보다 잘 나오고.




집에서 문제 풀 때는 항상 점수가 잘 나왔다.
그래서 시험 날엔 ‘긴장만 안 하면 돼. 내용을 꼼꼼히 읽고 풀면 되겠지’ 했다.
심지어 속으로는 이렇게 계산까지 했다.

‘설령 10개를 틀려도 앞부분은 다 맞을 거고 최악의 경우에도 8은 나오겠지.’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답을 골랐다.
그리고 지금, 내 셀핍 점수는 6.

누군가가 묻는다.
“너 셀핍 몇 점이야?”
리스닝이 12점이든 라이팅이 10점이든, 스피킹이 9점이든 아무 소용 없다.
제일 낮은 점수가 내 점수니까.
나의 셀핍 점수는 6점이다.

허탈함이 하루종일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내가 대충 공부해서 받은 미련의 점수다.”
스스로에게 열까지 받는다.
왜 그때 대충했지? 왜 더 안 했지?

그러다 불현듯 드는 생각.
“이거 답 체크 제대로 안 된 거 아니야? 시스템 오류 아닐까? 재채점 신청해야겠다!”

부랴부랴 셀핍 후기를 닥치는 대로 검색했다.
그리고 알았다.
리스닝 10점, 라이팅 9점, 스피킹 8점을 받고도 리딩에서 5점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셀핍 리딩은 그냥 ‘읽고 풀면 되는 시험’이 아니라, 문제를 많이 풀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시험이었다는 걸.

재채점으로 1점이라도 올릴 수 있대서 희망을 걸어보려 했지만, 리딩은 컴퓨터 채점.
확률? 거의 0%.
재채점 신청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자 진이 확 빠졌다.


어쨌든 지금은 현재의 내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길이 보일 테니까.

나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을 좋아했다.
실패했을 때 핑곗거리로 써먹기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 말조차 쓸 수가 없다.
나는 애초에 떨어질 만한 영어 실력조차 없었으니까.

언어라는 건 캐나다에 산다고 해서 그냥 느는 게 아니었다.
특히 셀핍, 토플, 아이엘츠 같은 시험은
단순한 영어 실력만 보는 게 아니라, 북미 문화에 대한 이해력과 잡지식까지 요구한다.
캐나다 신문을 읽든, 원서를 읽든… 공부를 따로 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생각해보면, 영어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건 딱 한 번.
스무 살 때 토익 만점을 받았을 때였다.
그 후로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흘렀고, 나는 그 10년 동안 영어공부를 아예 하지 않았다.

캐나다에 살면서도 한국 유튜브에 빠져 살았으니
영어 실력이 제자리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애초에 그건 어불성설이었다.


수능만점자가 하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은 희대의 개소리에 불과하다. 공부라는 거는 전혀 쉽지 않다.


이래나 저래나 아직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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