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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치킨

시험은 불합격 칼로리는 합격

by K 엔젤

“시험을 시작하세요.”
감독관의 말이 떨어지고, 나는 숨을 삼키며 시작 버튼을 눌렀다.
첫 화면은 마이크 테스트.

"Tell me about your favorite person."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냥 아무 이름이나 던졌다.
녹음이 잘 되었는지 들어보란다. 스피커에서 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볼륨이 너무 커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아마도 나중에 녹음 문제로 컴플레인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이렇게 크게 해둔 것 같았다.
“그래, 이민 점수는 결국 데시벨 싸움이다.”

마이크 테스트가 끝나자 리스닝 테스트 안내가 나왔다.
나는 안내를 듣는 동안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어 노트테이킹 준비를 했다.
이제부터 내 손목은 이민 점수를 적는 도구다.

첫 문제가 화면에 떴다. 두 사람의 일상 대화를 듣고 5문제를 푸는 유형.
근데 너무 금방 지나가서 대화 내용이 기억도 안 났다.
“이건 영어 시험이 아니라 기억력 게임인가?”

파트 2와 3까지는 노트테이킹 없이도 충분하다는데, 나는 그냥 불안했다.
틀릴까 봐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이 받아 적었다.
파트 4는 뉴스, 파트 5는 세 사람이 주제 토론, 파트 6은 오피니언.

생각보다 리스닝 주제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푸는 내내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물론, 편한 건 마음뿐이고 심장은 여전히 박자를 잃은 드럼처럼 뛰고 있었다.


다행히도 과학 관련 지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분야가 나오면 멘탈이 깨질 것 같았는데, 아는 주제가 나와서 그나마 숨이 트였다.

리스닝은 1분 안에 답을 골라야 하고, 답을 고르면 “다음” 버튼을 클릭해 넘어가야 한다.
나는 그냥 손도 안 대고 컴퓨터가 자동으로 넘어가게 내버려 뒀다.
“이민 점수는 내 손이 아니라 컴퓨터 손에 달렸다.”

파트 3까지는 비교적 수월했다. 하지만 막바지로 갈수록 알쏭달쏭한 문제들이 슬슬 등장했다.
노트테이킹 한 종이를 계속 바라보면서 “이게 답인가, 저게 답인가” 머릿속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냥 휙휙 넘겨버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화가 끝나면 내용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헷갈릴 때는 처음 찍은 답이 맞을 확률이 높다.
시험은 결국 직감의 싸움이었다.

리딩은 리스닝보다 수월했다. 모니터만 보고 38문제를 풀면 되니 부담이 덜했다.
물론 알쏭달쏭한 문제는 있었지만, 집에서 풀 때 많이 틀려도 10개 내외였다.
“10개 이하로만 틀리면 12점 만점에 9점은 나오겠지”
시험장에서조차 나는 스스로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결국 “헷갈려도 3문제 이내로 틀리고 라이팅으로 넘어가자”는 마인드로 리딩을 마쳤다.
이민 시험은 영어 실력보다 멘탈과 자기합리화의 연속이었다.


라이팅 문제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CELPIP을 준비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문제를 적어본다.

놀이공원에서 스태프에게 잡 오프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담당자에게 취업 문의 메일을 작성하라.

지역 커뮤니티에 경기장을 세우는 게 나은가, 아니면 공원을 세우는 게 나은가.


첫 번째 문제는 아주 무난했다. *“To whom it may concern”*으로 시작해,
“저는 캐나다 정부에서 시큐리티 오피서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모기지 페이먼트를 내야 하니 꼭 저를 뽑아주십시오. 시급과 근무 시간을 알려주세요.”
쓰고 나니 이건 영어 시험이 아니라 생활고 편지 같았다.

두 번째 문제는 나는 공원을 택했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운동할 곳이 부족하다. 학생들은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 시끄러운 경기장보단 조용한 공원이 낫다. 게다가 티켓이 비싸서 모두가 경기장을 이용할 수 없다면 세금만 날리는 꼴이다.”
쓰다 보니 캐나다 이민 시험인데 갑자기 내가 동네 민원 게시판에 글 쓰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라이팅을 쓰는 동안 집중을 방해한 건 다름 아닌 시험장의 소리.
옆자리에서는 스피킹 파트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동시에 마이크에 대고 영어를 뱉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건 영어 시험이 아니라 멘탈의 테스트다.”


마지막 파트, 대망의 스피킹.
다른 건 몰라도 스피킹만큼은 욕심이 났다. 점수가 안 나와도 “말은 할 줄 아는 인간”으로 기록되고 싶었다.

1번 문제는 졸업을 앞둔 친구에게 조언하기.
그동안 연습한 질문이었는데 문제는 긴장하면 늘 생긴다.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 톤이 쓸데없이 올라가 있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안녕 애나야, 일단 졸업 축하해! 한국으로 여행 가는 걸 추천해.
네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으니까 우리 가족도 볼 수 있을 거야.
길거리 음식도 꼭 먹어. 외국인들도 좋아해.
그리고 이번 달에 BTS 콘서트가 있어. 외국 사람들 진짜 많이 와.
정부에서도 외국인들한테 디스카운트 많이 해줘.
마지막으로 한국은 교통수단이 잘 돼 있어서 길 찾기 쉬워.
내 조언이 도움 되길. 안녕!”

시험 중인데도 내가 말하는 걸 듣다가 웃음이 나왔다.
“영주권 걸고 BTS 홍보하는 인간은 나밖에 없겠지.”


두 번째 문제는 기억에 남는 TV 프로그램이나 책, 그리고 그것에서 뭘 배웠고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는 거였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내가 평생 본 TV 프로그램이 갑자기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시험장에서 이런 건 꼭 그렇게 된다.

결국 아무거나 떠올려서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본 프로그램인데,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다뤘다. 그걸 보면서 타인의 시선을 이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속으로는 계속 생각했다.
“그래, 이건 스피킹이지 철학 에세이가 아니다. 멋있어 보이는 말이면 점수는 나오겠지.”

말을 마치고 나니 허무한 웃음이 났다.
시험장 안에서 내 인생의 깨달음마저 점수화되는 기분.
“CELPIP, 너는 대체 어디까지 평가할 거니?”


세 번째는 그림 묘사였다.
놀랍게도 그림이 내가 연습했던 것과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
그 순간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 싶었는데 막상 대답은 연습만큼 안 나왔다.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표현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입은 배신했다.
평소엔 준비된 배우 같던 내 영어가, 시험장에선 조연도 못 되는 엑스트라로 전락했다.

다음 문제는 미래 예측. will과 going to를 쓰면서 멋지게 말해야 했는데,
시간에 쫓기니까 결국 기본 동사로만 막 이어붙였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생각났다.
“아, 내가 아는 표현 절반도 안 썼네.”
결국 CELPIP 스피킹은 영어 실력보다 압박 속에서 입이 얼마나 버티는가의 게임이었다.


다섯 번째 문제는 옷 선택.
봄 재킷, 여름옷, 겨울옷 중 하나를 골라서 남편을 설득하라는 거였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남편도 없는데 일단 상상부터 하라는 건가?”
결국 없는 남편을 만들어내고, 가상의 남편에게 겨울옷을 사라고 설득했다.
시험장에서조차 현실과 상상은 뒤섞였다.

여섯 번째는 더 난감했다.
친구가 할머니에게 비싼 노트북을 사줬는데, 그걸 계속 쓰게 할 거냐, 아니면 다시 팔라고 말할 거냐.
머릿속으로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이민 점수가 걸린 시험에서 내가 지금 노트북을 빼앗는 손자가 돼야 하나?”

일곱 번째는 의견 문제.
요가 수업이 필요하냐, 필요 없냐.
이민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척추가 굳어가던 나는 즉시 말했다.
“요가 수업은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거의 간절함의 스피킹이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그림 문제.
장갑과 모자를 쓰고 있는 눈사람 모양 아이스크림을 보고 친구에게 사라고 설득하기.
그림을 보는 순간, 내 뇌가 잠시 멈췄다.
“이건 영어 시험이 아니라 개그 테스트 아닌가?”
결국 나는 아이스크림을 칭찬하며 열심히 설득했다.
그 순간만큼은 영주권이 아니라 눈사람 아이스크림이 더 간절했다.


CELPIP 스피킹은 1분 30초 안에 대답을 끝내야 한다.
할 말은 많은데 시간은 없으니, 마치 *“똥은 안 닦고 일단 변기에서 일어나는 느낌”으로 말을 끝냈다.

풍성하게 해주는 부사들, 뒷받침할 설명은 전부 잘려 나갔다.
그냥 핵심만 던지고 급하게 마무리.
말은 했는데, 뭔가 미완성.

게다가 셀핍 스피킹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정된 톤이라고 했는데,
첫 문제에서 흥분한 나머지 톤이 확 올라갔다.
스스로 “앗, 망했다”를 인식한 순간, 말은 더 빨라지고 꼬이기 시작했다.
영어는 목소리를 낮추면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데,
나는 오히려 톤이 올라가서 말도 짧아지고 정신도 붕 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한 걸까?”
질문 하나 끝날 때마다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인사만큼은 깔끔하게 하려고 했다.
한 문제 한 문제 넘어갈 때마다
“아… 이제 나밖에 안 남았구나. 시험도 끝나가는구나.”
그 생각과 함께 드디어 마지막 문제에 도착했다.


뭘 했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얘기하니 마침내 시험이 종료됐다는 허무한 메시지가 모니터에 떴다. 예상대로 내가 마지막으로 교실에 남아있었고 감독관한테 종이와 펜을 돌려주고 소지품을 다시 돌려받고 씁쓸한 발걸음으로 시험장을 나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머릿속은 난장판이 됐다.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은 왜 그렇게 빨리 했지?”
“아까 그 문제는 답 고치지 말 걸… 아, 물병이라도 가져올 걸”

특히 그림 문제.
“아니, 그 그림은 내가 연습한 거랑 똑같이 나왔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리딩을 더 공부했어야지! 3주 동안 한 건 뭐냐? 시간 낭비였던 거냐? 아님 차라리 공부를 안 하는 게 나았던 건가?”

자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민 점수 하나에 이렇게 온몸이 흔들릴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 같이 시험 본 친구가 말했다.
“셀핍은 공부 많이 한다고 점수가 확 오르는 시험이 아니야.
그날 컨디션이랑 운이 반이다. 그냥 평소 실력대로 친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듣자 허탈하게 웃음이 났다.
그래, 오늘은 그냥 내가 가진 걸 그대로 던진 날.
영주권의 무게가 실린 시험이었지만, 결국 내 컨디션과 손목, 그리고 그날의 운이 함께 친 셈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래도 3주 동안은 진짜 열심히 했잖아. 이건 상 줘야지.”

그래서 곧장 올해 새로 생겼다는 한국 치킨집으로 향했다.
부대찌개떡볶이, 허니갈릭 치킨, 양념치킨.
트레이 한가득 나온 음식들을 보자 시험 스트레스가 한 입마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영주권 점수는 아직 모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치킨이 내 점수를 올려주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대형 몰에 들러 스케쳐스에서 신발 한 켤레를 샀다.
시험의 긴장감이 발끝까지 내려앉은 것 같아서, 새 신발로 기분을 갈아 신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점수야, 어디 한 번 나와봐!”

영주권 점수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오늘은 최소한 내 발만큼은 당당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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