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안 주는데 잘 자란다. 억울하다
캐나다에서는 각 HCA(Health Care Aide, 간호조무사)마다 맡은 clients들이 이 정해져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자기 클라이언트만 케어하는 게 원칙이다. 근데 Metulla 할머니가 나한테 "혹시 나 먹을 것 좀 가져다 줄 수 있니?" 하고 물어보셔서, 나는 곧바로 그 할머니 담당인 Mayline에게 가서 말했다.
“메이린! Metulla 할머니가 오렌지 주스 달라지는데, 내가 갖다 드릴게 괜찮지?” Mayline이 고개 끄덕이길래 얼른 주스 가져다 드렸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 작은 확인이 사실 되게 중요하다. 역할 나눠져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선 넘었다는 오해 사면 곤란하니까. 참고로, 여기는 필리핀계 HCA들이 진짜 많고 오래 일해온 분들도 많아서, 필리핀 사람들끼리 좀 똘똘 뭉쳐서 텃세 있을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어차피 여기서 오래 같이 볼 사람들이고, 잘 지내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더 예의 바르게 지내려고 한다. 괜히 눈엣가시 되지 않게 말이다. 실제로 오래 일한 사람들인 만큼, 친해져서 도움 받으면 훨씬 든든할 수도 있고.
근데 진짜 웃긴 건 같이 수업 듣는 인도 친구들이 가끔 “필리핀 HCA 애들이 자기네 말로만 계속 얘기한다고 강사한테 불평”을 한다는 것이다. 근데 정작 걔네도 내 앞에서 힌디어든 펀자브어든 자기네 말로 엄청 떠든다는 사실. 그럴 때 보면, 나도 속으로 생각한다. ‘너네도 똑같이 그러잖아 ’ 이 상황이야말로 남이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해외에 나오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지내면 의사소통이 잘 되어서 좋지만, 그만큼 힘든 일도 많다.
며칠 전에는 Saatwik이랑 Taran이 싸웠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Saatwik이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Taran이 그걸 보고 “Saatwik, 너 여기서 뭐 해?”라고 물었고, Saatwik은 교수가 보낸 메시지를 잠깐 확인하려고 했던 거다. 근데 Taran은 실습 중에 핸드폰을 보면 안 된다고 얘기했고, Saatwik은 화가 나서 “나 교수님이 보낸 문자 확인하고 있었어! 별거 아닌 걸로 왜 이렇게 맨날 트집이야?”라고 했고, 결국 그게 싸움으로 번졌다고 했다.
Saatwik은 또 오늘 Sukpreet이라는 여자애랑도 실습 중에 싸웠다고 한다. Sukpreet이 할머니 옷을 입혀주는 걸 Saatwik이 못한다고 부탁했는데, Sukpreet이 인도말로 “왜 그것도 못해?”라고 말한 거다. 그러자 Saatwik은 “옷 입히는 거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말해?”라면서 Sukpreet한테 따졌고, 결국 또 싸움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둘 다 싸우는 걸 보면 가끔 생각한다. 사실, 내가 다른 친구들이랑 싸우지 않고 평소에 돕기만 한 이유는, 누군가는 자신의 자랑을 듣고 싶어 하고, 자기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손해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없지 않나?
예를 들어, Saatwik이 Shirin 할머니 머리 빗어달라고 했을 때, 나는 흔쾌히 “알았어!” 하고 도와줬다. Taran이 아시안 할아버지가 밥 먹는 거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도와줬고, Sukpreet이 옷 수거함에 넣는 걸 깜빡했다고 해서 내가 대신 넣어주기도 했다. 또, Linda가 자기 할머니 목도리 좀 입혀달라고 해서 “알았어!” 하고 치우는 것도 도와줬다. 어렵지 않은데 굳이 안 해줄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다. 나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게 좀 더 편한 사람인 것 같다.
인도사람이지만 같은 이유로 일부러 인도애들이랑 어울리지 않으려는 Karam이 애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우리 제발 서로 도우면서 일하자’고 한마디 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고 일도 잘 돌아간다고. 맞는 말이다.
점심시간에 Hirji 할머니 밥 먹이고 있는데, Mayline이 나한테 와서 "너 한국에선 무슨 일 했어?"라고 물어본다. 나는 장난스럽게 "나는 한국에서 의사였어."라고 대답한다. "진짜?" Mayline이 놀라서 묻는다. "농담이야! 나는 사회복지사였는데, 의료 분야에 관심이 생겨서 이 일을 시작했어."라고 말했다.
Mayline이 "이 일 재밌어?"라고 묻길래, 나는 "재밌어, 아주!"라고 답했다. 그러자 Mayline이 "아직까지는 재밌어?"라고 놀린다. 그 말이 은근히 "이 일이 쉽지만은 않을 거야"라고 나한테 전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역할 부담이 잘 되어있다. 오늘은 부엌에서 일하는 Naff라는 인도 친구가 나한테 와서 "너 피부 엄청 좋다, 부럽다. 너 예뻐, 한국 사람 맞지?"라고 물었다. 아까 Richard라는 클라이언트도 나한테 "일본 사람 아니면 한국 사람 같은데, 아시안 여자들은 예뻐. 내가 20대로 돌아가면 난 한국 사람이랑 연애 아니면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는데.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지쳐가고 있을 때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시간에 내가 눈여겨본 건, 사람마다 먹는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Hirji 할머니는 음식에 꼭 칠리파우더를 뿌려먹는다. 식빵을 드실 때는 잘게 잘게 썰어서 먹거나, 식빵 안에 있는 내용물만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반면에 Metulla 할머니는 토스트 먹는 방법을 잘 알고 계셔서, 계란 스크램블을 토스트에 올려놓고 한 번에 싹 먹는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고 맛있게 보였다. 어떤 할아버지는 기관에서 주는 딸기잼은 절대 안 먹고 자기가 가져온 땅콩버터만 먹는다.
5월 11일은 Mother's Day다.
센터 곳곳에 이 날을 축하하는 장식들을 예쁘게 해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할머니들을 찾아오는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손자가 찾아와서 할머니랑 포옹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중국인 할머니의 남편이 직접 찾아와서 밥을 먹여주는 모습이었다. 누가 뭐래도, 결국은 가족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Hirji 할머니 옆에 앉아있던 Rwa 할머니는 딸이 준 카드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정말 기뻐했다. "어제 내 딸이 Happy Mother's Day라고 날 찾아왔어, 손녀딸도 왔다 갔어." 나는 그 할머니에게 "할머니, 오늘 머리 스타일이 정말 이뻐요!"라고 했고, 할머니는 "머리도 손녀딸이 꾸며주고 갔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옆 테이블을 둘러보니 Saatwik이 담당하는 Shirin 할머니도 평소와 다르게 예쁘게 꾸며진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가족이 방문하지 않는 할머니는 담당 HCA가 대신 머리를 꾸며드렸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족의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고, 그런 작은 배려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실습 후에는 리뷰 시간이 있었고, 그 후에는 궁금한 점을 묻는 Q&A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How do you manage emotional boundaries with clients while still providing compassionate care?" (어떻게 감정적인 경계를 관리하면서도 여전히 동정심을 가지고 돌봄을 제공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사실 Hirji 할머니 케어를 하면서 약간 혼란스러웠던 점이 있었다. 할머니에게 바지가 없고 치마만 있어서, 그때 나는 "내가 쓰지 않는 바지가 많은데, 그걸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Hirji 할머니 케어할 때 안 쓰는 내 물건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더니, 강사는 "네가 하는 일과 개인적인 부분은 분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일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네가 케어하는 고객들과 너무 감정적으로 가까워졌다면, 그 고객이 사고가 났거나 돌아가셨을 때, 그때 너는 어떻게 될 것 같나요? 그 고객이 너를 고소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문제가 커질 수 있다. 환자들의 가족들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환자들에게는 네가 아닌 더 가까운 가족들이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라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감정적인 경계를 잘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감정적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강사는 내가 한 질문에 대해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 칭찬 덕분에 내 질문이 잘 표현되었다는 느낌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실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는데 그 순간 문득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나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해온 탓인지 피부가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80대 할머니들조차 피부 관리를 하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데, 나는 아직 젊은데도 피부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쓰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크림도 거의 다 써가고 선크림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일한다고 소홀히 했던 내 피부한테 미안해지면서, 집에 오는 길에 모자, 아이크림, 선크림, 수면팩 등을 몇 개 사 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케어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이상하리만큼 캐나다에는 민들레가 여기저기 많았다. 집주인도 화단에 민들레를 엄청 많이 심어놓았고, 집에 오는 길거리에 민들레가 가득 피어있었다. 민들레를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것은 결국 내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 같았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모두 꽃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인생은 그 자체로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민들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가에 피어있는 풀처럼 우리는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 때, 그로 인해 인생이 괴로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법륜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길가에 피어있는 한 포기 풀처럼 그냥 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