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나요

풀타임 하나에 흔들리는 삶

by K 엔젤

4일차 ㅡ 존재와 살아감 사이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처음으로 픽업 근무에 들어간 날이었다. 출근하자마자 다른 빌딩으로 보내졌고, 필리핀 부부와 함께 일했다.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어리둥절했지만 차라리 “이거 해, 저거 해”라고 직접 시켜주는 편이 낫다고 느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지나 있었다.


10시쯤 돼서야 숨을 고를 틈이 생겼다. 필리핀 아주머니들은 에너지와 기세가 장난 아니었지만, 남자 파트너와 일하니 마음은 조금 편했다. 일 끝나고 치매 어르신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본인의 현재 삶을 “living(살아감)이 아니라 existence(존재)”라고 표현하는 모습이 묘하게 가슴을 찔렀다. 지나간 젊음을 회상하는 그 표정이 오래 남았다.


새 빌딩에서 일하니 또 배울 게 많았다. 쓰레기통 비우는 시간, 세탁물 떨어뜨리는 곳, 소각장 위치까지. 오리엔테이션 때 다 들었던 내용인데도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이곳의 RN 제이를 보니 한결 편하게 일하는 것 같아서 부럽기도 했다. 현실은 현실이지만.

그나마 같이 일한 릴리아가 밝아서 하루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5일차 ㅡ 첫술에 배부를 리 없으니까


오늘은 제일 큰 빌딩에서 근무했다. 파트너는 나와 같은 날 입사한 인도 남자. “정리된 방식으로 일하고 싶지만, 우리 둘 다 초보니까 그냥 마음 비우고 하자”라고 서로 위로하며 근무를 시작했다.

샤워해야 하는 어르신이 여덟 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짝 겁이 났지만, 다행히 나는 assigned resident만 케어하면 됐고 샤워 보조는 다른 직원이 맡았다. 그래도 병실이 많아서 적응하기에는 충분히 벅찼다. ‘첫술에 배부르랴? 오늘은 묻어가기만 하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1층과 2층을 오가다가 플로터로 일하던 인도 여자에게서 무전이 왔다. 도와달라는 호출이었다. 내가 초짜인지 금세 알아봤는지, “처음이면 당연히 헤매지. No wonder why you are lost”라며 웃었다. 누군가 갑자기 대변을 보면 순간 손이 바빠지며 당황하는데, “침착해야 한다”고 조언까지 덧붙였다.

그 여자애는 일 한지 세달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필요할 때 무전으로 “help, help” 하고 찾는 걸 보니, ‘그래도 쓸모 있는 인간이구나’ 싶어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오늘은 기저귀 갈기도 성공했다.


홍콩계 어르신이 많은 빌딩이라 그 가족분들과도 마주쳤다. 한 홍콩 아주머니가 “너희 너무 바쁜 것 같은데 간호사들이 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적응할 거야.” 그 말이 괜히 힘이 되었다.


근무 막바지에 인도 간호사가 식사를 마친 할머니를 데리고 방에들어가서 산소 기계를 연결하라고 했다. 그래서 식사실에서 산소 기계를 가져가서 옮기려 했더니 “아냐, 방에 다른 기계 있어”라며 웃었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냥 웃고 넘겼다. 이곳은 두 명이 한 팀으로 일하기 때문에 서로 묻고 답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 나는 aide다. 내 주관 앞세우기보다 맡은 일만 해내는 게 우선.


퇴근 직전 내부 채용 공고가 떴다. 템포러리 포지션. 지원할까 말까 고민이 시작됐다.

정규직이 되려면 시니어리티 순인데, 나보다 몇 달 먼저 온 직원이 이미 훨씬 많은 시간을 채우고 있으니 경쟁이 될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모두가 이곳에서 정규직을 원하는 건 아니라고 하니, 나에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비 내리는 레인쿠버. 귀가하는 길에 맞은 비가 묘하게 내 기분과 닮아 있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0화다시 시작한 직장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