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시그널: 쉼터편

담요 밑에서 피어나는 기막힌 로맨스

by K 엔젤



스티븐 할아버지 이야기


노숙자 지원 센터에서 일하면 밤을 새우는 날이 많다.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이곳에서는 하루가 길게 이어진다.

그중에서 스티븐 할아버지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올해 78세, 센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이다.

젊을 때는 배관공으로 20대와 30대를 보냈고 40대에 이혼한 뒤 혼자 살다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손등에 남은 굵은 주름과 거친 손바닥을 보면 그가 지나온 시간이 어떤지 대충 짐작이 된다.
이곳에서 함께 일하며 마주치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일 조금씩 내 일상에 스며들고있다.

평소 내게 다가와서 전 아내와 딸의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 하는 Steven


센터의 로맨티스트, John


우리 센터에서 제일 로맨틱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John이다. 사랑 얘기만 나오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40대 미혼남. 한때 그는 약혼녀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지금은 서로의 사정 때문에 결혼식은 기약 없이 멈춰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약혼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소박하게 웃는다. 이곳에서는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인 사람이 많지만, John은 여전히 사랑 얘기를 한다. 그래서인지 센터 한쪽 공기는 늘 조금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만난 스티븐 할아버지

최근 술을 즐기던 스티븐 할아버지의 간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그가 한동안 센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낯익은 걸음걸이에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냥 다시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유독 할아버지 얼굴이 전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고 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가 조심스럽게 귀띔했다. 얼마 전, 스티븐 할아버지의 전 아내가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할아버지가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로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일을 겪은 것이다.

아내의 생전 편지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스티븐 할아버지의 모습


스티븐 할아버지에게 건넨 작은 위로

부인을 떠나보낸 뒤 할아버지는 3주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입맛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당뇨가 있어도 늘 군것질을 좋아하던 분이라 왠지 더 마음이 쓰였다. 나는 평소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과자를 조심스레 건네며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봤다.


최근 술을 즐기던 스티븐 할아버지의 간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걱정이 서서히 쌓이던 차에, 그가 한동안 센터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익은 걸음걸이를 보고 순간 가슴이 놓였다. 그냥 다시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퍼졌다. 하지만 과자를 건네도, 편지를 읽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상실감이 할아버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늘 나에게 친절하던 그 사람이 오늘따라 한없이 작고 가여워 보였다. 죽은 아내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군 할아버지를 보니 내 눈가에도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사랑을 품은 밤

스티븐 할아버지는 나처럼 소리에 민감해 귀마개 없이는 잠을 못 잔다. 비슷한 점이 많아서인지 유독 정이 더 갔던 것 같다. 잠을 못 잘 것 같다고 걱정했지만, 편지를 접은 뒤 곧 잠든 그의 얼굴은 오랜만에 편안해 보였다. 오늘 밤만큼은 사랑하는 아내의 꿈을 꾸길 바랐다.

매일을 약혼반지를 끼고 잠이드는 John. 꿈속에서라도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약혼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John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가 하루빨리 행복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기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곳에서 그들과 하루의 반을 함께 보내며 나는 매번 느낀다. 사랑을 잃은 사람도,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도 결국은 그 마음으로 버티고 살아간다는 걸.


이곳의 로맨티스트들


노숙자들도 사랑을 안다. 20년 전의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 읽고, 약혼반지를 낀 채 잠에 드는 낭만적인 사람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누군가를 끝까지 지킨다는 게 어떤 건지. 나도 이곳에서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사랑하는 이를 꿈꾸며 행복하게 잠든 이곳의 로맨티스트들을 바라보며 오늘 밤, 나 역시 그 대답을 찾아 헤맨다.



⚠️모든 사진은 당사자 동의아래 촬영/첨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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