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식탁, 차가운 세상

먹는 건 쉽지만 사는건 어렵다

by K 엔젤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배리에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아침이 되자, 직장 곳곳에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해피 뉴 이어!” 문자 보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새해에도 여전히 나는 이곳 노숙자 들과 하루를 같이 한다. 정확히 2023년 11월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그들과 함께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솔직히 한국이었다면, 사람에 대한 변덕이 심하고 한 일에 쉽게 싫증을 내는 내 성격으로 같은 곳에서 1년을 버티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시작한 이 사회복지사 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니, 가끔은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서 이렇게 오래 버티고 있는 걸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는 이렇다.


집과 가까운 거리

캐나다처럼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 추운 한겨울에도 일을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건, 집에서 일터까지 버스로 10분, 차로 4분, 걸어서는 35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날씨가 화창한 날엔 아침 근무 전에 조깅하는 기분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지난여름 오후 근무를 마친 뒤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문득 생각한다. 만약 집과 일터가 이렇게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일을 지금까지 이어왔을까? 이 지역에서 최저시급을 넘는 알바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이곳 덕분에 학교를 다니면서도 꾸준히 돈을 벌 수 있었다. 방학에도 일할 수 있었고, 이제는 학기만 남았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단순한 직장을 넘어서 내 생활을 지탱해 준, 고마운 발판 같은 곳이다.


영어를 나보다 잘하는 노숙자들


캐나다 노숙자들이 다 영어를 하니까 이곳에서 일하러 오는 게 마냥 싫지많은 않은 것이다. 만약 같은 일을 해도 모국어인 한국어로 일을 했다면 서로 의사소통이 너무나도 잘되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일할 때 어차피 외국어인 영어로 서로 말을 하기 때문에 노숙자들이 가끔 나한테 소리를 지른다거나 신경질을 부려도 별 타격감이 없는 것이다.


웬만하면 그냥 무던하게 지나가는데 내가 들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굳이 꼽자면 새로 입소한 흑인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이 없는 그 애가 비웃으면서 무리 속에서 나를 겨냥해 한말이 기억에 남는다.


"She is staying quiet because she doesn't understand what we are talking about


내가 그들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을 때,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던진 말이었다. 직접적인 차별이라기보다는 ‘동양인은 영어를 잘 못하겠지’라는 편견이 섞인, 돌려서 깎아내리는 말.


순간 공기가 살짝 얼어붙었지만, 그 말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 던진 것임을 알기에 악의는 없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서인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냥 담담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싸우거나 수다를 떨 때면 호기심이 발동한다. 어떤 단어를 쓰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 보면 모르는 영어 표현을 하나둘 배워간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덤으로 영어 공부까지 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이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 가벼워진다.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

이곳에서 일하는 게 즐거운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다.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공존하며 살아간다.


항상 책을 읽고 있는 마이크


일하다 보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몇 명이 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그 깊은 지식에 내가 오히려 감탄하게 된다. 문학을 사랑하는 Mike는 늘 시집을 들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는 게 취미라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적어온 노트 몇 권을 내게 보여주었다. 빼곡히 적힌 구절들을 외우며 들뜬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그 순간이 내겐 더 흥미롭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추리소설 광신도 Justin


또 10대 시절 영화감독을 꿈꿨다는 저스틴은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독서광이다. 밤이 되면 침대에 올라가 불이 꺼지기 전 11시까지, 베리 도서관에서 빌려온 추리소설을 붙잡고 있는 게 그의 일상이다. 사회 전반의 다양한 분야에 해박해서, 대화를 시작하면 정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아주 머리가 비상한 청년이다.

한 번은 영화 기생충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직후,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고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거, 내가 본 외국 영화 중 제일 좋아.
근데 결말이 관객 상상에 조금 더 맡겨졌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는 스토리 전개 방식의 장점을 설명하면서도, 아쉬운 점을 조곤조곤 짚어냈다. 그의 창의력과 날카로운 시선은 아마도 수많은 책 속에서 길러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은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간다. 20살의 감수성이 풍부한 요조숙녀 Sarah는 며칠 전부터 캐나다 중학생들이 푸는 수학 문제집을 끌어안고 잠이 든다.


잠들기전 수학문제 푸는 사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는 사라에게 물어봤다.


“왜 수학 문제를 풀고 있어?”


그녀는 해맑게 대답했다.



“수학 풀면 희열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잠이 잘 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수학이었다는 Sarah는, 언젠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자기 새엄마처럼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며 수줍게 지은 미소가, 묘하게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신문을 정독하고 있는 필립


정치에 유난히 관심 많은 필립 아저씨는 신문을 정기구독해 밤늦게까지 읽는 게 일상이다. 요즘 그가 가장 열을 올리는 주제는 캐나다와 인도의 미묘한 관계다.

그중에서도 최근 필립 아저씨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캐나다가 인도 비자 발급을 언제 다시 열까?”다.

캐나다 사람들 중에는 이민자가 너무 많다며 총리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는 정반대다. 그는 캐나다가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고 했다.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일하는 이민자들이 캐나다 경제를 살리고 있어.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난 다시 태어나면 난 캐나다 말고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보고 싶어.”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귀에 맴돌았다.


나는 이곳의 열정 가득한 사람들이 좋다.

2024년 새해가 밝자, 센터에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여기서 일하며 발견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노숙자들 중에도 낮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작업복을 입고 오기도 하고, 보안 일을 하는 이들이 유니폼 차림으로 센터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곳의 삶이 결코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그중에서도 내 눈에 유독 띄는 친구는 Thomas.

토마스는 온라인 컬리지에서 경영학을 전공 중인 학생으로, 올해 모든 과정을 마치고 북키핑 자격증을 취득할 예정이라고 했다. 항상 가방 가득 노트와 책을 넣어 다니는 그의 학구열을 보면, 나까지 덩달아 공부 욕심이 불타오른다. 졸업을 앞두고 설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작년 겨울 잠들기 직전까지 재무회계 책을 붙들고 공부하던 내 모습이 겹쳐져 순간 울컥했다.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Congratulation man! Good luck with your test!


(올해는 꼭 자격증 합격할 거예요. 끝까지 파이팅!)



술에 취해 오자마자 침대에 뻗은 직장인 Ryan.

넷째 주 금요일은 정부 지원금이 나오는, 이른바 payday이다.

페이데이가 되면 정부 지원금을 받은 노숙자들이 저녁 시간에 비틀거리며 센터로 들어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근처 바에서 한잔 걸치고, 알딸딸해진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작은 풍경이다.


헬조선이 아니고 헬 캐나다

여기서 일을 하다 보면 캐나다 복지가 엉망이라며 쥐스탱 총리를 욕하는 노숙자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그들에게 캐나다는 ‘헬케나다’다. 나는 늘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캐나다 사람들도 자기 나라를 이렇게 욕한다는 사실에 한동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헬조선’이라 불러도, 한국에서 좋은 직업을 갖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은 결국 한국에서 태어난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결국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잘 못 살면 헬이고, 잘 나가면 그곳이 곧 헤븐 아니겠는가.


한국도 캐나다도 취업난

2024년이 된 지도 벌써 닷새째. 지난 크리스마스부터 며칠 동안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길래 슬쩍 보니, 스물여섯 Kyle은 구직 신청서를 붙들고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피자도 안먹고 구직신청서를 작성하는 Kyle의 모습


어느 나라든 직장 구하기는 참 쉽지가 않다.

열정으로 똘똘 뭉친 그가, 새해에는 꼭 원하는 곳에 취업하길 바라본다.


HAPPY NEW YEAR, K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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