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 여행기
열 남매 중 아홉째인 엄마는 위로 다섯 명의 오빠와 세 명의 언니, 그리고 한 명의 남동생이 있다. 외가의 고향인 전북 임실에서 시작해 경기 부천, 서울까지 곳곳에 흩어진 가족 중 엄마는 다섯 살 차이 나는 셋째 이모와의 왕래가 가장 잦다. 이모의 딸이자 나의 친척인 네 살 터울의 언니가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여자’로 묶인 두 모녀는 종종 국내 여행을 떠나거나 근교지로 나들이를 가곤 했다. 하지만 미처 동행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모와 언니의 베트남 여행이었다.
“이모 다낭 간대. 나도 좀 데려가라고 했더니 오랜만에 딸이랑 둘이 데이트 좀 해 보자고 하더라.”
“우리도 가면 되지.”
“됐어. 뭐 하러 그 멀리까지 가?”
언제는 자기도 데려가라더니. 겉으로 아닌 척하지만 내심 부러워하는 엄마의 투명한 속이 보인다. 외면하고 싶은 속내까지 알아채고 마는 것이 큰딸의 숙명인 것을.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미래의 내가 보여 다짜고짜 ‘엄마와 여행’을 검색했다.
목적지는 베트남 중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휴양지로 유명한 나트랑으로 정했다. 추운 날씨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를 위한 맞춤형 여행지다. 직장 일이 언제 다시 바빠질지 몰라 연초(年初)가 지난 시점에서 한 달 뒤인 2월로 급히 여행 일정을 잡았다. 동남아 휴양지의 특성상 한국이 겨울일 때 성수기인 만큼 하루라도 빨리 비행기 표를 예매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네 번의 해외여행과 한 달간의 배낭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엄마는 여권조차 발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 첫 효도 여행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첫 번째로 떼야 하는 걸음마는 여권을 발급하는 일이다. 우선 사진관에서 여권용 사진을 찍어야 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가격이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려고 하는 엄마에게 달콤한 네이버 예약 할인 이벤트를 내밀어 시청 근처에 있는 사진관으로 유인에 성공했다. 동그란 얼굴에 눈썹과 귀가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 푸르스름한 팔자 눈썹 아래로 반짝이는 고동색 눈망울, 오밀조밀한 코와 입술의 조화를 이루는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은 이런 말 하기는 뭐 하지만... 꼭 갓 태어난 아기 동자 같았다. “우리 엄마 회춘했네!” 장난 섞인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족 밴드에 사진을 올린 엄마는 짧고 강한 한 줄을 함께 남겼다.
‘여권사진 찍었어요’
그 후 엄마는 기본 중의 기본인 신분증을 두고 온 죄로 다음 날 다시 시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다.
두 번째로 떼야 하는 걸음마는 돈 걱정을 버리는 것이다. 자식 있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아이가 말하는 순간 벅차서 눈물이 난다고 하던데, 가혹하고 냉정한 나는 여행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동안 엄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대한민국을 떠나는 만큼 제발 돈 걱정은 잠시 넣어 두기를 바랐다. 비행기 표, 숙소, 체험, 환전 등 모든 비용을 내가 지불할 테니 엄마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미리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평화로운 여행을 도모하는 ‘부모님 여행 십계명’ 규칙까지 세운 딸들의 예견대로 그놈의 돈은 뻔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엄마는 우연히 본 홈쇼핑의 나트랑 여행 패키지를 내밀더니 차라리 이게 더 저렴하지 않냐며 이미 마친 예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고, 나는 처음부터 찾아온 막강한 고비에 ‘이럴 거면 나 안 가!’라는 초강력 응수를 두었다. 그러자 조그맣게 웅얼대는 엄마의 입이 짠하기도 했지만, 이번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하게 맞서야 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는 2월 중순의 어느 날. 봄을 바라보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김치찌개를 든든하게 먹은 나와 엄마는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휴대성 좋은 검은색 크로스백을 메고, 두 팔을 휘휘 저으며 걸어가는 엄마의 유쾌한 발걸음을 놓칠세라 빠르게 카메라 촬영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를 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브이를 그린 손가락을 눈가에 대는 엄마는 역시 아기 동자임이 틀림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진첩에는 엄마가 찍어 준 내 사진만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먼저 카메라를 들이밀어 엄마의 모습을 기록하는 내가 있다. 문득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영상으로 많이 남겨 두라는 조언이 떠올라 차오른 뭉클한 감정을 애써 누른 채 엄마에게로 달려가 팔짱을 꼈다. 아직 우리는 살날이 더 많을 거라는 약속의 고리였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약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착륙한 베트남은 꿉꿉한 한국의 여름 날씨였다.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도착한 아미아나 리조트에서 늦은 체크인을 했다. 피곤한 몸을 뉘었다가 칠흑같이 깜깜한 밤을 건너온 아침에 바라본 리조트의 전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를 가르며 우뚝 솟은 초록색 야자수와 바람 타고 철썩거리는 파도를 요리조리 피하며 모래사장을 자유롭게 누비는 강아지들까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은 자연만이 과시할 수 있는 찬란한 생명이 넘쳐흘렀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엄마의 첫 해외여행 순간들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나 엄마가 아직 못 뗀 걸음마가 있었으니, 바로 살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집안 내력으로 풍채가 좋은 엄마는 출산한 뒤 살이 기하급수적으로 쪘다고 했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아가씨 시절에는 나와 몸무게가 비슷했다며 종종 과거를 그리워한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50년 동안 강요받은 살에 대한 강박은 쉽게 뗄 수 없는 꼬리표라는 것을 알지만, 여기에서만큼은 엄마도 남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휴양하는 당당한 여성이 되기를 원했다. 더운 날씨에는 자연스럽게 살이 드러나는 옷을 입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삐죽삐죽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몸 자체를 가리기에 급급한 엄마가 미웠다. 역설적으로 찍힌 사진마다 신체 부위를 나노 단위로 평가하며 뚱뚱해서 보기 싫다고 말하는 엄마의 마음이 이해되어 그냥 벗으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엄마의 몸은 체질적으로 근육까지 한 데 붙어 한국 사회가 아름답다고 규정하는 여성의 몸과 부합하지 않겠지만, 존재 그 자체로 동등한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아름다울 필요도, 아름답게 꾸밀 필요도 없는 몸이다. 조일 대로 조여진 ‘한국 여자’ 코르셋은 쉽게 벗을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남(男)에게 벗겨질지언정 스스로 벗어야만 한다. 슬프게도 지금의 엄마에게는 이런 내 생각이 온전하게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넌 (상대적으로) 말랐으니까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거야”라는 핀잔을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저 멀리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엄마의 몸은 이 세계를 담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고.
3박 5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하늘은 하얬다.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쌓인 눈이 녹고 얼어 깨진 빙판의 파편들은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시공간을 넘어 파란 계절에 머무는 동안 깨달았다. 엄마는 쌀국수에 향이 강한 채소를 넣어 먹는 것을 좋아하고, 물에 빠져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무이네 사막 언덕에서 직각으로 내리꽂는 지프차의 스릴을 좋아하고, 엉터리 영어로 가격 흥정까지 할 수 있는 당차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죄책감을 덜고자 마련한 여행에서 엄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수록 마음의 부채는 더 쌓여만 갔다. 엄마는 나에게 굳이 나서서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는 애매한 말을 툭 던졌지만 위로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차차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번에는 엄마랑 같이 가야 한다며 다른 여행지를 알아보는 여자 친구들의 메시지, 스피치 학원에서 들은 일면식 없는 여자 수강생의 모녀 효도 여행기, 마흔이 넘은 나도 아직 못 한 효도 여행을 어린 나이에 보내 드린 거냐며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남자 사장님의 칭찬, K-장녀는 어쩔 수 없이 가장의 책임을 느낀다는 친척 언니의 말.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에 아들내미는 키워 봤자 소용없다며 딸이 최고라는 말로 부여되는 이 시대 딸들의 역할. 그리고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애쓰는 내가 있었다.
불공평한 책임의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평등이라는 짐 때문이다. 딸에게 가장의 역할이 주어지며, 남아보다 여아를 선호하는 시대적 흐름이 달갑지 않은 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OECD 1위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있으며, 미취학 아동의 등하굣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머리를 질끈 묶은 여성들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성별에 따라 자식의 역할도 다르게 부여한다. 장남의 책임은 높은 사회적 위치에서 자본을 창출하는 것이지만, 장녀의 책임은 자식 키우다가 경력이 단절되어 버린 중년 여성의 애환을 연민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같은 여성이기에 엄마의 삶을 더 깊이 관찰할 수밖에 없어서,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어서 효녀의 부채를 안고 살아간다. 부채는 곧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여성인 엄마의 희생을 부추겼다는 생각에 느끼는 죄책감이다. 남(男)들처럼 마냥 돈으로 지울 수 없는 짐이기에 더욱 버겁다.
짐을 짊어지지도, 내려놓지도 못하는 구제불능의 내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파괴적인 효녀의 족쇄를 차차 부수는 것이다. 딸에게만 강요되는 역할을 과감히 삭제하고, 가정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가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조금씩 여성으로 종속되는 삶에서 벗어나는 걸음마를 떼야 한다. 언젠가 홀로 한국을 떠나는 엄마를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