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 재학 중 방학 때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지어먹기 시작했다. 약을 복용하고 부작용으로 목이 휘어지는 증상이 있어서 주사를 받고 나아졌다. 입원은 한 번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신병원에 잠깐 입원했었다. 처음에는 입원이 두려웠다. 밤에 잠도 안 오고 변비도 생기고 힘들었다. 퇴원하고 집에서 약을 복용하면서 지냈다. 조현병 진단을 받고 처음에는 우우울했으나 약을 복용하고 나아졌다. 약을 복용하다가 중단하기도 했으나 다시 재발 복용하기 시작했다. 망상, 환청 증상이 개선되고 좋아졌다. 피해망상 증상이 있어서 늘 우울, 불안했으나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싸우자는 환청 증상도 많이 나아졌다. 환청은 이제 개의치 않고 그냥 넘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외래를 다니면서 증상을 조절하면 병이 많이 호전될 것이다.
- 70년생 K
<병약> 내가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병이 고쳐지기 위한 것이다. 나는 병이란 것을 다스려봐도 그냥 있는데. 내가 약이란 것을, 접해 봐서는, 그냥 좋아지므로. 약은 ‘강’이다. 약은 강약 중 강이고. 약은 ‘강’이다. 약은 흐르는 강처럼 인생이 유하게 흐르게 해준다.
- 97년생 Y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에 있는데 갑자기 귀에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무서워서 동생을 안고 거실에 이불을 덮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서 어머니와 이대목동병원에 가서 증상을 말하기 약을 타와서 복용을 하였다. 1998년도에 환청이라는 병을 알았다. 환청 때문에 대학교도 포기해야 했다. 병을 알았을 때 어머니가 내가 제일 친한 친구를 불러서 고기를 먹으러 갔었다. 고기를 다 먹은 후 어머니는 나를 오신경정신과에 입원시켰다. 처음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무섭고 두려웠다. 처음 들어간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입원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입원해서 침대에 계속 누워있었다. 무슨 일도 하는 일도 없이 계속 누워있었다. 그 후에 퇴원하고 재입원 했을 때 답배를 피웠다. 퇴원, 입원을 많이 반복했다. 입원했을 때 어머니, 아버지가 빵을 많이 사와서 내가 먹고 싶을 때 보호사에게 말해서 그 때마다 빵과 우유를 먹었다. 아버지가 면회를 자주 왔었다. 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족발과 담배 1갑씩을 꼭 면회 올 때 항상 족발과 담배 1갑을 주었다. 병원도 이 병원 저 병원을 많이 다녔다. 병원에서는 매달 15일은 맛있는 것 시켜 먹기를 했었다. 짜장면, 통닭, 족발은 같이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그리고 샴푸나 스킨로션을 담배와 바꾸어서 담배를 구해서 많이 피웠다. 담배를 훔쳐 피우다가 들켜서 많이 혼난 기억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아련하다. 아버지가 항상 면회오신 때가 기억이 난다. 지금은 동생과 아빠가 없지만 그 때는 살아 있었다. 동생은 용인대에 다녔고 아버지는 중화요리를 했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면회를 많이 온 것 기억이 많이 난다. 아버지와 동생과 추억이 생각난다. 울고만 싶어진다. 아버지와 동생이 살아 있으면 그 때 더 잘할 걸 하고 후회감이 든다. 정말 슬프다. 그 때가 그립다.
- 78년생 L
K공장에서 난 일을 잘했다. 남들이 3개 할 때 난 4개를 할 정도로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다 새로운 기술자가 와서 사장님이 날 잘랐다. 그 후로 여기저기로 헤매다 한 공장으로 갔는데 일을 하다 친구가 한 달에 150만원을 번다고 했다. 난 그때 4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그런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 전에 조증이 있었는데 친구가 150만원을 번다는 생각에 난 기분이 다운됐다. 그 후로 일의 의욕도 떨어져 계속 우울했다. 퇴근하면 매일 막걸리 한 병을 먹었다. 그렇게 석 달 동안 계속 되었다. 그 당시 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일하는 동안에 술을 몰래 먹다 사장님에게 걸려서 회사에서 잘리게 되었다. 그 후 공원과 만화방을 전전하다 죽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수면제를 사 모았다. 그리고 50알의 수면제를 다 모아서 여인숙에서 술과 같이 먹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토하게 되었다. 난 죽지 않았다. 그래도 안 죽어서 부천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가에서 얼어 죽으려고 명절이 다 되어가는 시기에 진눈깨비가 오는 날에 그 길가에서 얼어 죽으려고 길가 비스듬한 곳에서 이틀을 얼음이 얼 정도의 그곳에서 누워서 죽으려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았다. 그래도 죽지 않자 아는 형에게 전화를 해서 그 형 집으로 가서 살았다.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요즘이었다면 죽으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울증은 너무 힘들었다. 지금 다시 그때 갔다면 어떤 결심을 했을지 모를 정도다.
- 71년생 K
내가 병을 깨달았을 때가 고1때였다. 그때 불안하고 귀에서 소리도 났을 때였다. 그래서 병을 앓게 되었다. 병을 젊을 때 빨리 치료해야 된다. 그래서 나 혼자 병이 아픈데 끙끙거렸다. 조현병이라는 단어가 확정되었다.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 병을 깨달았어도 아픈 거는 잘 안 고쳐진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서 약 5개월 정도 입원하고 또 몸이 안 따라줘서 입원했다. 지금은 약으로 조절 중이다. 나는 깨달았을 때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지적장애인처럼 안 보이는데 나는 아프다고 병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그냥 가만히 있는다. 영양 보조도 있었다. 병이란 참 힘든 시기에 걸렸다. 나도 모르게 아무도 몰랐던 병이 생겨서 나는 참으로 두려웠었다. 맨 처음에 복지카드도 만들고 혜택도 많이 받고 있다. 독방에 가둬서 문도 잠그고 면회도 못 할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 줄로도 묶고 코에 무언가 쑤시고 했다. 부모님도 마음이 불안하고 고생이 많았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외출도 했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참 있다가 퇴원을 해서 참 좋았다. 병을 완치하고 장애인을 벗어나 사회생활을 당당하게 대기업 사장을 하고 싶다. 내 꿈이다. 약을 꾸준히 먹고 나 스스로 노력을 해야 되고 병을 낫고 싶다. 지적장애를 판단하였을 때 나는 참 막막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이 깨닫는 글을 썼다. 그래서 결론은 처음과 끝이 있다 보니 발전을 하고 싶다.
- 89년생 M
중학교 2학년 우울하며 공부가 안 되며 학습장애가 왔다. 책이 눈에 안 들어오고 단체생활이 힘들어지고, 싸움이 무서워졌다. 또래들이 처음 진단을 받게 되고, 폐쇄병동에 입원하면서 다른 환경, 아픔에 받아들이며, 병동생활을 노력하려고 하고 매일 일기를 쓰며, 병동 프로그램을 참여했다. 갑갑하고, 두렵고 무서웠지만, 잘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왜 조현병, 우울증, 조울증 등 병에 거렸고 난 왜 병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나와의 문제, 타인과의 문제 등 사람들과의 대인기피증 등 왕따 등 내가 문제 있는 거지 생각하고, 술을 알게 되며 자해도 해보고 훌훌 털고 일어나려고 회복되려고 지금 나아가고 있고, 동광에 다니고 있다. 2보 후퇴를 위한 1보 후퇴란 말이 있듯이, 힘들 때 발라드 노래를 엄청 들었다. 더 우울해지기 보다 위로를 받았다. 더 좋아지고 나아지기 위해 승오가 있다. 더 이상 후퇴 나빠지진 말자. 임파워먼트 역량 파이팅!
- 88년생 M
나는 中 1때 정신과적 병을 깨닫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오랜 치료를 해보았지만 현재까지 병에 얽매어 있는 것 같다. 나의 병은 우울증, 정신분열증, 강박증이 있는 것으로 추측 된다. 우울감이 있거나 환청, 망상이 있거나 강박사고, 행동이 있겠다. 나는 처음에 입원한 것이 외래치료를 받다가 증상이 생겨 그 후에 입원했다. 입원생활을 오래 한 것으로 여겨진다. 길게는 2년, 짧게는 3-4개월 입원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66년생 H
10년 전쯤 일이다. 층간 소음으로 신경전을 벌일 때였다. 막연하게 층간 소음이 아니라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였다. 윗 층에서 쿵쿵 옆집에서 달그락 쿵쿵 쾅 하고 문 닫는 소리 등등. 나는 소음으로 인해 위축되어 있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인내하고 인내했다. 그러나 새벽까지 쿵쿵 쾅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윗 층 집에도 올라가 보고 옆집에도 문을 두드려 좀 조심해달라고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도저히 못 살겠다 생각했지만 이사 갈 처지가 안 됐었다. 그 당시 나는 직장을 다녔고 월세도 비쌌기 때문에 그냥 잠을 좀 못 자더라도 참고 참았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불안증이 왔었다. 나는 식탁 밑으로 숨어 버렸다. 진정이 되질 않았다. 결국 119에 전화를 했다. 집 근처 삼성병원에 갔다. 그날은 응급실에서 처치하고 귀가시켰다. 그러나 집에만 들어오면 또다시 불안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결국 가족들의 권유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너무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찾아온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한 지는 5년 전의 일이지만 내가 처음 병을 알았을 때는 훨씬 전인거 같다. 그 뒤로는 약을 찾으러 이병원 저병원 돌아다니며 마루타가 되었다. 약 부작용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어느정도 약도 찾아가면서 회복의 길을 걷고 있다. 열심히 꾸준히 운동도 하면서 노력하고 있다. 이 병은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 어느정도 일상생활 할 정도면 이쯤에서 멈추어야 한다. 매 순간 순간마다 나는 운동을 한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좀 더 증상이 완화될 거라는 생각을 스스로 믿고 열심히 운동을 한다. 아무튼 회복이라는 희망을 안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고 싶다.
- 67년생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