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잘 사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비자를 어떻게 받았는지가 궁금할 뿐
해외에서 살기로 결심했는가? 그렇다면 이젠 비자를 만들 차례다.
비자는 외국인에 대한 입국 허가를 증명하는 증명서다. 입국할 때 그 여권 소지자가 안전하게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현재 한국은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괌, 사이판, 마카오, 필리핀, 인도네시아,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멕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튀니지 등과 비자면제 협정을 체결하고 있어 대부분 1~3개월(30~90일) 체류가 가능하다.(외교부 홈페이지 2019년 5월 기준).
하지만 여행이 아닌 거주를 위한 목적으로 입국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발리(발리가 나라 이름 같지만 인도네시아의 섬이다)에 다녀와본 사람이라면 무비자로 30일 거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거주하던 2014년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 입국 시 도착 비자비(미화 25달러)를 내야 했다. 대신 지금처럼 30일이 아닌 60일 체류가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업을 목적으로 거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일단 인도네시아에서는 외국인이 개인 사업을 할 수 없다. 사업을 하려면 현지인 파트너의 이름을 빌려 회사를 세워야 한다. 비자 발급비는 미화로 1200달러. 회사 이름으로 된 통장(현지인 파트너가 부지런 떨어서 만들어 놓았다는 조건 하에)에 비자 비용을 송금하고, 영수증을 제출하면 비자 발급이 진행된다. 1년짜리 체류 비자라 하더라도 제출해야 할 서류도 많고 발급도 까다로운 편이다. 연령 제한, 학력 제한, 경력 유무 등을 증명해야 체류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체류 비자를 받은 뒤에는 15일 내로 거주 지역 내에 위치한 이민국(imigrasi)에 가서 외국인 등록을 해야 했다. 문제는 체류 비자가 나온다 하더라도 외국인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법규는 다 정해져 있지만 빠져나갈 구멍도 항시 존재한다는 거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태국, 필리핀 등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십분 이해할 거다. 물론 우리가 자카르타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에서 사업을 시작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눈에 거슬리는 일만 하지 않으면, 일하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일이 잘못되면 추방당할 수 있는 외국인 신분이었기에 24시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매년 체류 비자를 갱신할 때마다 들어가는 작업비(좋게 말해 작업이지 중개인을 통해 관련 부서 관료에게 뇌물을 먹이는 과정)가 들었다. 비자가 연장될 거란 보장도 없고, 된다 해도 처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 넉넉 잡고 3개월 전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더 빨리 일이 진행될 수도 있다. '급행'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더 얹어 준다면 말이다. 결국 우리는 기본 비자 발급 비용은 미화 1200달러 (한화 140만 원)에 급행료 한화 70만 원가량을 더 얹어 겨우 기한에 맞춰 비자를 연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을 당사자가 직접 처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이민국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의 종류가 너무 많고, 관련 서류를 비치하고 있는 관공서의 위치도 제각각이다. 심지어 어떤 서류는 자카르타까지 가서 가져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과 이동 비용을 생각하면 웃돈 얹어 주는 것과 거의 비슷한 금액이 나오는 만큼 인도네시아에서는 비자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었다. 정권이 바뀌니 당연히 인도네시아의 요직에도 인사이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담당자가 바뀌자 이전에 별일 없이 잘 진행되던 일에도 괜한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일은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것이었다.
중개인(우리 부부의 비자를 만들어 준)은 정권이 교체되면서 자신의 연줄들이 사라져 비자를 내어 줄 수 없다고 했다. 2014년에 레스토랑을 오픈한 뒤로 가맹점이 3개 더 늘어난 상태였기에 이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여기서 더 머무를 수 없다니.. 그동안 쌓아 온 모래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 신세가 될 순 없었다.
남편이 다른 중개인을 섭외해 일을 진행해보았지만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비자 작업비로 건네 준 돈을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했다. 눈물을 머금고 가맹점에 권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또 다른 곳을 찾아 나섰다.
아주 새로운 일을 하기보단 기존의 일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서울치킨'이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을 주 메뉴로 하는 레스토랑인 만큼 한류가 주를 이루는 나라인 말레이시아와 대만을 후보지로 삼고 정보를 수집했다. 한국에서 치킨집을 오픈하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일지 몰라도 해외에서는 아직까지 블루오션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이번엔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나라이길 바랬다. 말레이시아와 대만을 차례로 방문했다.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분위기도 비슷했지만 한국 교민들이 이미 많이 들어와 있어 시장이 포화 상태였다. 반면 대만은 안전한 주변 환경(인도가 없는 인도네시아에서 살다 대만에서 두발로 거니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과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후자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책임감 없이 일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태도와 무슬림 환경(새벽 5시마다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 1년에 1번 있는 라마단 등)에 많이 지쳐 있지 않았나 싶다.
대만에 체류하려면 역시나 비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진행방식이 인도네시아와 사뭇 달랐다. 일단 외국인이 회사를 세우려면 투자금이 필요했다. (인도네시아에선 현지인이 회사를 세우므로 이럴 필요는 없었다. 한국도 자국민이 회사를 세울 경우엔 동전 100원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이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대만 친구(캐나다 어학연수 시절 알고 지낸 사이로 15년간 신뢰를 쌓아온 사이)와 함께 한화 3000만 원(대만에서 외국인에게 비자를 내어줄 수 있는 회사를 설립할 때 투자해야 할 최소금액)을 들여 '외국인 투자 법인 회사'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남편이 먼저 거류비자 및 공작 허가증(工作許可證, work permit)을 발급받았다. 이 모든 과정은 대만의 이민 컨설팅 회사를 통해 수수료를 납입하고 진행했다. 기한과 절차에 맞게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합법적으로 일을 진행하니 그동안의 불안함 역시 해소되는 것 같았다.
1달여간의 시간이 지나고 컨설팅 회사에서 말한 스케줄대로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보다 2달 정도 시간을 세이브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 남편이 먼저 대만으로 출국해 집을 얻고 가게를 오픈할 준비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 명이 가서 함께 헤매기보다 한 명이 우선 자리 잡아 놓는 것이 낫다는 계산에서였다.
남편이 대만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 나와 아이는 남편이 받은 체류 비자를 바탕으로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주 한국 타이베이 대표부'(대만은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에서 대사관과 영사관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를 찾아 방문 비자를 먼저 발급받은 뒤 대만에 입국했다. 방문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법인 회사 관련 서류, 혼인관계 증명서, 가족관계 증명서, 아이의 출생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때 영문이 아닌 중문으로 공증을 받아야 한다.
중국과 대만은 같은 보통어(mandarin)를 사용하지만 중국은 기존 한자를 간단하게 표현한 간체(簡體, Simplified), 대만은 우리나라와 같이 번체(繁體, Traditional)를 사용한다. 이걸 모르고 다짜고짜 중국어 공증 업체에 문의했다가 다수 업체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이렇게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수소문 끝에 대만 비자 관련 전문 번역 공증 회사를 찾을 수 있었고 공증 대행 서비스를 통해 대만 대표 부영사 공증을 받았다. 기간은 약 2주 정도 걸렸으며, 비용은 각 서류당 약 20만 원의 번역 공증비가 들었다.
길고 긴 과정을 거쳐 드디어 대만에 도착했다. 입국심사 시 방문 비자를 제시하니 15일 이내에 거주 지역에 위치한 이민소(移民署)를 찾아 거류증(居留證, ARC, Alien Resident Certificate)을 신청하라고 했다. 며칠 후 이민소를 방문했더니 1인당 1000 NTD(약 한화 3만 8천 원)의 비용을 더 내야 한다고 했다. 다 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유모차 끌고 다시 나가서 현금을 인출해 왔다. 그런데 또 부족한 서류가 있었다.(네버엔딩..) 그렇게 이민소 를 제 집 드나들듯이 방문한 끝에 서류가 접수되었고 2주 후 거류증을 수령해가라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다시 낯선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비자 대행업체를 이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에서 직접 거류증을 발급받은 이유는 대만의 일처리가 비교적 청렴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오가는 번거로움이 있을지 몰라도 비자 발급 시 뒷돈을 요구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고, 대만 거주 3년 차인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0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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