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들면 왜?라고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보래. 그럼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대!”
대학생일 때였다. 가장 친한 친구가 헤어지기 직전 지하철역 앞에서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주었다. 그 당시 우리는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고 빌려주기도 하며 서로의 성장을 돕고 있었다. 그 말이 어느 책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추천만 받고 읽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감정과 생각의 근원을 향해 계속 질문하는 것은 어느새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이후의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왜?라고 질문하는 것. 사실 친구에게 듣기 훨씬 전부터도 많이 해왔던 것이다. 어릴 적 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이건 왜 그래?”, “이건 뭐야?”, “왜 이 사진에는 내가 없어?”, “왜 나는 안 줘?” 등 귀찮은 질문을 수시로 했었다. 다행히 자식 일에 무심한 아빠와 관대한 엄마 덕에 왜 자꾸 물어보냐는 핀잔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엄마는 나의 뚱딴지같은 질문에도 늘 성심성의껏 답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질문하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그 힘을 나 자신에게 써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스쳐 지나듯 들었던 그 말로 인해, 내 마음속에 있던 작은 문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바깥세상으로만 향해있던 시선을 반대로 돌려, 나의 내면 세상을 향해서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들면 한 발짝 떨어져서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함께 여행 간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을 보고 괜스레 울적해진다.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 울적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왜일까? 왜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내게 같이 여행 가자고 묻지 않아서?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못 가서? 여행을 갈 수 없는 지금의 바쁜 상황이 싫어서? 나는 평범한 프로필 사진인데 반해 사진 속 그들은 너무나 즐거워 보여서? 내가 아직 못 가본 나라를 그 친구들이 먼저 가서?’ 등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더 나아가 ‘나는 아직 못 가본 나라를 그 친구들이 먼저 가는 게 어때서? 남보다 무언가를 먼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왜지? 관심받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성격이 급한 게 이런 부분에서도 티가 나는 것일까?’라는 식으로 점점 더 근원적인 답을 향해 내려가보는 것이다.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어쩌면 계속 질문해도 진짜 답을 못 찾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진짜 답을 알고 싶지 않거나 귀찮은 마음에 대강 속으로 얼버무리며 결론지을 때도 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왜?’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그 순간의 피상적인 감정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마치 감정으로 가득 찬 방의 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것처럼, 감정의 종료 버튼을 의식적으로 빨리 누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나의 본심도 반복된 질문을 통해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다. “그 사람은 예의 없어서 싫어”라고 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나는 잘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그 사람은 잘 해내고 또 그것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내 기분을 살피지 않았다는 점이 싫었을 수도 있다. “난 그거 별로더라”라고 했지만, 어쩌면 나도 그 물건을 가지고 싶은데 지금 살 만한 상황이 아니고, 상대방이 세련된 그 물건을 능숙하게 잘 다루는 모습을 보니, 내가 괜히 뒤처지는 것 같아 그건 별로라는 생각에 잠깐 기대어보는 걸 수도 있다.
이렇게 내 감정과 생각의 본질을 향해 파고드는 연습을 하다 보니, 순간적인 느낌에 휘둘리지 않고 내 마음을 좀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영향을 받는 일도 줄어들게 되었다. 쉽게 화를 내거나 센 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본인의 내면을 진득하게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 자신과의 작업을 통해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물론 타인의 본심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 정답은 영원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말과 행동의 이면에 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같은 인간으로서 알기에 초연해질 수 있다. 친구가 알려준 방법은 의외로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주었다.
계속해서 왜?라고 스스로에게 묻다 보니 내 마음의 민낯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본심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애써 나를 변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나를 변명할 필요가 없으니 그만큼 내면이 더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마음속으로, 때로는 입 밖으로 쓸데없는 변명을 하며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문답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질문의 힘은 강력하다. 특히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나에게 딱 맞는 답을 알려주므로 확고한 힘이 생긴다. 왜?라고 계속해서 묻다 보면 어느새 나는 답을 알게 된다. 피상적인 답이 아닌 근원적인 답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 조금 힘들거나 고민이 있다 해서 바로 친구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친구와의 만남은 즐겁지만 내 질문의 근원에 함께 내려가볼 수는 없다. 그저 그 주위만 같이 맴돌다 “오늘 재밌었어. 다음에 또 보자.”하고 헤어질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결을 알려준 그 친구와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제일 친하고 의지했던, 베프였던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내 영역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친구는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인생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믿고, 인간관계 역시 유효기간이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아쉬움이나 그리움 등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 시절 함께 성장하며 그 친구가 전해준 말이 내 인생의 비결이 되었듯, 내가 전해준 말과 글들도 그 친구에게 비결이 되어 남아있길 희망한다. 왜냐고?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