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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haS Mar 02. 2023

한 겨울 낮의 추억

갑자기 점심 약속이 취소되었다. 혼자서 간단히 먹고 산책을 나섰다. 날씨는 추웠지만 왠지 걷고 싶은 날이었다. 정오의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호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느릿느릿 걸었다.      


걷다 보니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가 나왔다. ‘그래 맞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내가 예전에 살던 집이 있었지..’ 새삼 추억에 잠겼다. 천천히 걸으며 내 눈에 담겨있던 옛 모습들을 떠올렸다. ‘이 가게는 그대로 있네. 장사 계속 잘 되나 보다. 어라, 이 가게는 바뀌었네. 그때 그 집 맛있었는데..’ 마음속에서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깜박이는 횡단보도 불빛에 뛰지 않고 멈춰 섰다. 동네를 더 찬찬히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예전에 살 땐 더 빨리 집에 가기 위해서, 정류장에 막 도착한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뛰어다녔던 그 횡단보도다. 도로 끝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는 이렇게 동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살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가로수도, 평범한 건물도 의미있게 다가왔다. 평일 대낮에 별안간 감상에 잠겼다.      




불과 몇 년 전인데 과거가 되니 아련해졌다. 일상의 흔적은 없으면서 내게 익숙한 장소. 그 동네는 이제 추억의 한 편에 자리한다. 그 시절 힘든 일이 분명 많았던 것 같은데 아련한 감정만 떠오르는 걸 보면, 힘들었던 일은 모두 거름이 되어 나를 키운 게 분명하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자주 봐야 하지만, 그 관계가 특별해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익숙함과 거리두기 사이에는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쌓여야만 한다. 그런 일상이 없으면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 될 뿐이다.      


그 일상 속에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분노와 슬픔도 있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영원히 안 보는 사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기울기를 잘 조절해 신뢰가 쌓이면 부정적인 감정은 거름이 되고 돈독함이란 열매를 선물한다.      


익숙함, 거리두기, 희로애락. 세 가지가 잘 갖춰지면 모든 평범함은 특별함으로 바뀐다. 의미가 생긴다. 그렇게 옛날 일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분자분 걸었다. 찰나였지만 점심 산책은 추억 여행이 되었다.

     



시계를 보고 회사를 향해 다시 되돌아갔다. 빌딩숲 사이로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 왜인지 아까보다 추워진 것 같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으며 오후에 할 일들을 떠올렸다. 출입구에서 회사 목걸이를 꺼냈다. 점심시간이 끝났다. 현실로 돌아왔다.      


정오의 산책도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단지 그 동네가 일상의 흔적 없이 익숙한 곳이었기에 특별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게 익숙한 모든 것들은, 모든 곳들은, 모든 사람들은 일상에서 멀어져 추억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추억 속에 있다.


한 겨울 낮의 추억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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