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가 있어도 괜찮아
미모는 내가 출근해서 들어오면 집으로 쏙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겁에 질린 두 눈과 얼음처럼 굳은 몸으로 웅크려 있다. 나와 함께 이 집에 들어와 산지도 2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하다. 그러나 미니는 벌렁 누워 배를 드러낸다. 마치 강아지처럼 신나서 배를 보이며 만져달라고 하는 것 같다.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앞서가 벌러덩 눕거나 엉덩이를 보이며 엉덩이를 두들겨 달라고 한다. 소위 엉덩이 팡팡이라는 것을 해 주지 않으면 내 다리에 얼굴을 비벼대며 치댄다. 마치 "난 네가 좋아. 너도 나 좋지?" 하며 좋다고 온몸으로 말을 하는 것 같다.
미모는 나 이외의 사람이 와도 자기 집에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얼음처럼 가만히 있는다. 그 사람이 한 시간 동안 머무르든 반나절을 있든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미니는 아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숨다가 10~20분이 지난 면 살며시 다가와 살핀다. 그리고 오라고 하면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쓰다듬어 주거나 궁둥이 팡팡해 주면 긴장을 풀고 우리 주변에 머문다.
미모는 까미와 막내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다. 까미는 삼 년 전 총명이, 씩씩이, 미모, 소심이 그렇게 네 형제들을 낳았다. 그리고 태어난 지 6~7개월 되었을 때 형제들 중 두 마리가 범백 바이러스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어미를 닮아 유난히 조심성이 많고 불안이 높은 길냥이였다. 미모와 총명 이를 구조해서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았지만 총명이는 병원에서 일주일 만에 먼 곳으로 떠났고 미모는 두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살아났고 그 이후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미모는 죽음이라는 두려운 경험을 했을 것이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아픈 주사를 맞고 온갖 검사로 인해 무서웠을 것이다. 또한 길냥이라 집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처음 듣는 소리여서인지 많이 무서워했다. 예를 들면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에도 겁을 먹고 숨숨집 안으로 숨었으며, 전기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라든지 초인종 소리라든지 생활의 모든 소리가 공포인 듯 무서워했다. 인간과의 생활 그 자체가 두려움인 듯했다. 그리고 밤마다 창밖을 보며 울어댔고 나가려고 했다. 어린 미모는 죽음과 낯선 곳의 이주 등이 PTS(트라우마) 였던 것 같다.
반면 미니는 생후 3개월 정도로 추정된 아기였고 처음부터 사람손을 탄 상태에서 발견했다. 엄밀히 말하면 발견도 아니다. 집 앞 한쪽 길냥이들에게 사료와 물을 주는 급식소 옆에 놓여 있었고 그곳을 2주 동안 떠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으니까. 누군가에게 버려졌을 것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 많았으며 미니 혼자가 아니라 형제와 함께 두 마리가 버려진 상태였다. 둘이라서 서로 의지하며 길 위에서의 삶을 견뎌냈던 것 같았다. 2주째 되는 어느 날 미니는 탈수와 원인 모를 다리 부상으로 시름시름 앓았고 결국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 주었다. 그리고 임시 보호하다 한 마리는 입양을 보냈고 미니는 나의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았다. 미니에게는 끔찍한 병원생활의 공포도 형제의 죽음도 낯선 인간들의 두려운 생활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와의 생활도 금세 적응했고 낯선 사람이 방문해도 금방 적응하고 다가왔다.
미모는 오래 기다려 줘야 한다. 억지로 집에서 꺼내면 안 된다. 더 불안해하고 더 어두운 곳에 숨으려고 한다. 사람도 그렇다. PTS가 있다면 말이다.
트라우마는 마음의 큰 상처가 몸에 남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즉, 온몸이 얼어 붓듯 굳어버리거나, 심장이 매우 빨리 뛰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되거나, 식은땀이 엄청 많이 흐르거나 온몸을 벌벌 떨거나 하는 증상들이 그런 경우다. 상처받았던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증상들이 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회피나 도피적인 행동도 한다. 트라우마로 인한 몸의 반응은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쉽게 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문적이고 유능한 상담사의 치료가 필요하고 때론 약물치료도 필요하다.
나는 미모에게 시간을 두고 다간다. 그리고 숨숨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미모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이야기해 준다. " 미모야 괜찮아. 난 너를 안 버려. 여기는 안전해. 내가 지켜줄게. 난 너를 사랑하니깐. 괜찮아. 여긴 우리 집이니까 안전하단다. 괜찮아.... 괜찮아....."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 주면 미모도 알아듣는 듯 두 눈은 편안해지고 잠시 후 자기 집에서 나와 스트레칭하듯 길게 몸을 피고 자기 얼굴을 내 다리에 부비며 애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길게 하품을 한다. 드디어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 년째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