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 상가리 마을..동동 편
중산간서로를 달리다 보면 고내봉을 앞에 두고 도로 아래편에 알록달록 더럭초등학교가 보이는 더럭초 교차로가 나온다. 한라산 방향에 있는 커다란 현수막 거치대를 끼고 좌회전을 하고 길 위로 올라서면 애상로다. 길위로 한라산자락이 훤히 보이는 높지 않은 고즈넉한 마을이 있다. 애월읍 상가리다.
고려 충렬왕때 하가리에 연화못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마을로 조선 태종때(1414년) 고내리에서 분리되었다. 마을의 옛 이름은 웃더럭, 상더럭이다. 최초의 입촌 자인 양기, 양유침 부자가 嘉樂(제주시 가락)출신이다. 그가 살던 곳이 嘉樂村이어서 加樂(더할 가자와 즐길 락자로 더 즐거움을 나타낸 이름)으로 한자표기한 것이다. 우리말을 吏讀(이독) 식으로 발음하여 더할가자(加)를 "더"로 하고 즐길락 자(樂)의 락은 "럭"으로 변화하여 「더럭」으로 부르게 된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마을은 중산간 서로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바리메오름, 안천이오름, 노로오름까지 길게 누웠다.
제주에서는 드물게 해안가를 끼지 않은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은 본동(동동)과 서동, 원동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동동과 서동은 지금 보이는 마을을 동서로 구분해서 얘기한다. 원동은 지금의 평화로 근처다. 4.3에 소개되어서 잃어버린 마을이다.
원동에는 조선시대에 서원(西院)이 있었고 원을 근거로 해서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길의 중간에 위치했다. 길은 목사가 제주목관아에서 출발해서 서문을 나와 제주향교-오리정(현 국제공항)-정존(노형초등학교 일대)-광령-서원-동광-인성리로 하여 대정현에 다다르게 되어 있는데, 목사가 처음 쉬어가는 원참인 관영여관이 있던 곳이다.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과 주막이 있어서 목을 축일 수도 있었던 곳이다. 16가구가 있었으나 대부분이 소길리 지경에 거주하고 있었고, 5가구만이 상가리 지역이라 마을과의 연대성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4.3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국방경비대 토벌대의 기습으로 주민들을 집단학살 했다. 지금은 이야기속에서만 전해지는 잃어버린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신우면(애월읍) 지역에 유일하게 서학당이 있었던 마을로 교육의 중심지였다. 서학당에서는 유림 자제들에게 경전과 시문을 교육하였다. 시인과 묵객들은 마을 뒤편에 있는 하운암이라는 암자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 영향인지 상가리에서는 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문인, 선비의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제주도에서 상가리 출신 공무원들이 많다.
애상로에서 보이는 리 사무소 표석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상가북6길이다. 마을회관까지 50여m 길이다. 표석 정면에는 관신로라는 도로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마을에서는 이 길을 관신로라고 부르는 것 같다. 1987년 마을회관을 지어서 마을에 기증한 재알교포 변관신이라는 분을 기리기 위한 길이다.
여기서 50여m를 들어가면 상가리 마을회관이라는 표석이 나온다. 마을 공동시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한눈에 보아도 큼지막한 공간, 여유로운 공간이다. 여기에는 마을회관, 경로당, 부녀회관, 청년회관, 게이트볼장, 잔디공원, 대형 창고 등이 모두 모여있다. 도내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마을의 공동시설이 이렇게 한 장소에 집단으로 큰 공간에 모여있는 곳은 없다. 마을 공동체의 힘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마을의 약사를 보면 이러한 공간이나 시설들이 모두 마을 출신 인사들의 성금과 기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회관 주위에는 온통 공덕비가 가득하다. 마을공동체의 정신이나 애향심이 아주 남달랐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동서로 두 개의 촌락 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동동, 서동이다.
마을의 주요 생산활동은 감귤이다. 마을을 들어서는 입구부터 귤밭이다. 어느 집을 가든 몇 그루의 감귤나무와 풋감나무는 기본이다. 집들은 마을 안길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다.
잘 포장된 마을 안길은 구불구불하고 많이 휘어진다. 원래 제주의 마을 안길이나 올레는 구불구불 많이 휘어지고, 깊었다. 나쁜 기운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게하고, 사생활을 보호하자는 생각에서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길이 많이 직선화 됐다고 한다. 길이 펴지고 넓어지면서 길가로 튀어나왔던 쉼팡들이 없어지면서 마을의 문화는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을의 안길은 제주스럽다.
집과 안길의 경계는 나지막한 제주의 돌담길이다. 가끔은 벽돌조나 가지런히 정리된 여기서는 조금은 어색한 돌담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이 마을은 제주 원형의 돌담과 마을안길, 민가 등이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카메라 작가들의 핫스팟이기도 하다.
마을 안길 모퉁이를 돌아서는 길, 올레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어김없이 세월을 머금은 지 오래된 팽나무들이 산재해 있다.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의 애환을 모두 알고 있는 동네의 수호신들이다. 제주에서 팽나무는 당산목(堂山木)이다.
마을안길을 돌아보는 길, 아직은 마을의 스카이라인을 해치거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거슬리는 건물은 없다. 가끔은 농가를 리모델링한 주택정도가 눈이 뛸 뿐이다.
마을회관 입구에서 동쪽을 보면 문화곳간 마루 150m라는 표식이 있다. 곳간은 창고를 얘기하는 제주어다. 동동마을로 조금을 걸어가면 길 아래 3그루의 팽나무가 나온다. 나무 사이로 잔디밭이 있는 넒은 공간에 창고같은 건물 2동이 보인다. 입구에는 무용의 집 문화 곳간 마루라는 조그만 입간판이 있다. 상가리 1237번지다.
원래는 농협창고와 마을 곡식 창고 였다. 2013년 문화체육부의 문화디자인 프로젝트에 "상가리 문화 곳간 조성사업"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마을사 박물관과 갤러리, 서학당, 작품창작실과 소규모 공연장과 아트캠 프장을 만들어서 주민들의 모임장이자 체험 공간으로 사용했다. 2019년에는 무용예술 스튜디오로 다시 개보수하고 전문 무용수들의 공간으로 무상으로 임대하고 있디. 1동은 연습실, 1동은 전시관이다.
마을이 무용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 임대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무상으로 임대하면서 마을에서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도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마을에서는 조금만 걷다 보면 팽나무다. 두 그루의 팽나무가 거대한 게이트를 만들어주고 있는 곳도 있다. 마치 결혼식 날 집 대문가에 세웠던 솔문같은 모습이다. 팽나무 아래에는 다소 어색한 쉼팡이 있다. 시멘트칠을 한 나지막한 쉼팡이다. 이런 걸 언밸런스라고 부르는 것도 좋을 법하다.
팽나무 있는 곳, 조금 못 미쳐 돌담 벽에는 1970년대식 공고판이 버젓이 서 있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으로 도로 정비나 포장하면서 길가에는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콘크리트로 벽보판(?)을 만들었다. 마을마다 몇 개씩은 있었다.
문구도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타임머신이다.
NO1, 마을에서 1번 공고판인 모양이다. "반공 방첩, 자조·자립·협동, 1972년 4,30일 준공"이라고 선명하다. 1972년이면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때이고, 유신헌법이 시작되던 해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근면·자립·협동인데 자조·자립·협동은 초기 버전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회색빛으로 일장춘몽이었던 빛바랜 역사의 공허함을 얘기해주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