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동체의 활성화,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을까?
해가 바뀔 때쯤 마을 이장들의 가장 큰 고민은 내년 살림살이다.
어느 마을을 가든 열에 여덟 아홉 마을 이장들의 하소연이다. 심각한 얼굴에 이장은 "마을에 돈이 어선.."으로 시작을 한다. 물론 이런 걱정에서 자유로운 마을 재정이 넉넉한 속칭 부자마을들도 있다. 주위의 부러움을 산다. 이런 마을에 이장은 일단 일하는데 재정적 부담은 없기에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하고 매번 바뀐다.
마을에 무슨 돈이 필요하지? 언듯 드는 생각이다.
이장은 무보수직이고, 사무장은 행정에서 돈이 나올 것이고 사무실인 넉넉한 마을회관도 있는데 더 이상의 무슨 돈이 필요해? 또 마을에 불편한 사항은 행정에서 지원해 줄 것이고, 가끔은 마을 출신 인사들이 재정적으로 기부를 하는 것도 같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아주 피상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을을 방문하고서도 한참이 지나 서다. 누가 처음 가는 낯선 이에게 마을의 곳간 얘기를 하겠는가?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자 고민을 털어놓는다. 가끔은 마을의 정기총회 때 회계자료도 보여준다. 작은 마을에서도 1년에 안 들어도 3,000만 원 이상은 있어야 된다는 것이 이장들의 주장이었다.
마을은 작은 정부다.
마을 운영에도 돈이 들어갈 곳은 많다.
이장은 월 급여는 없지만 그래도 업무추진비(판공비)가 마을 형편에 따라서 책정이 되어야 하고, 사무장 월급도 행정에서 전부 지원되는 것은 아니다. 행정의 일을 대신해 주는 보상으로 일부가 지원된다. 리사무소의 운영비도 비슷하다.
마을에서는 매년 치러야 하는 연중행사가 꽤 있다.
마을 정기총회, 경로잔치, 신년인사회와 각 자생단체의 행사들 모두가 돈이 필요하다. 대부분 마을회에서 보조를 해주어야 한다. 마을체육대회와 격년제로 열리는 읍·면·동단위 단합대회 참가비용은 가장 큰돈이다. 행사 때마다 주위나 고향 선후배들로부터 스폰을 받기도 하지만 주는 것 없이 단지 마을출신이라는 이유로 매번 손을 벌리는 일, 대략 난감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든 마을이 스폰을 받든, 비용을 대체 부담하든 마을이 해야 하는 일이다.
각종 마을사업을 하는데도 자부담이라는 부분이 있다.
순수하게 공공성 일이 아닌 마을의 사적영역과 관련된 부분에 예산을 지원해 주는 경우 완전 공짜는 없다. 적게는 10%에서 30%까지 자부담을 해야 하는데, 대응비용에 따라 억대를 넘어가는 경우도 발생한다. 마을에서 예산을 사용하려면 개발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위원회는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한다. 마을 어른들이 점령하고 있는 좀 보수적인 집단이다. 마을 돈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수입이 발생할 사업이라도 통과가 어려운데, 수입이 불투명한 마을 사업인 경우는 아예 거부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눈에 보이는 아쉬운 사업도 못하고 다른 마을에 넘기는 것을 눈뜨고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가난한 마을의 비애를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이라고 한다.
마을의 재정확보방안은 다양하다.
그러나 자연자원과 마을의 유산이 큰 몫을 한다.
마을의 재정이 든든한 곳은 마을의 자산이나 자연자원이 많은 곳이다. 즉 시드머니(Seed Money)가 든든한 곳이다.
이중 가장 부러움을 사는 곳은 마을 내 해수욕장같이 계속적으로 수입이 나오는 자연 자원이 있는 마을이다. 물론 해수욕장의 관리권이 마을에 있는 경우다. 매년 별다른 투자 없이 수입이 발생한다. 때문에 이런 마을의 이장선거는 마치 도의원 선거를 방불케 현수막이 붙으면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마을공동목장은 제주마을공동체의 오랜 산물이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시절 143개소였던 공동목장은 현재 77개소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중 마을회나 목장조합의 소유인 경우가 60여 곳이 된다. 마을목장은 소유가 아니라 관리와 이용이 문제다. 공동목장 토지를 임대하거나, 풍력 발전을 유치함으로써 풍족하게 마을의 재원을 확보하는 마을들도 있다.
최근에는 행정의 공공시설을 유치함으로써 재정을 확보하는 마을도 있다. 행정은 다른 마을들이 기피하는 시설을 유치하는 경우는 각종 행·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마을에 각종 혜택이나 지원을 해준다. 심지어는 마을에서 맡아서 운영하고 수입을 낼 수 있는 시설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마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대형 민간 생산시설들이 들어오는 경우도 비슷하다. 행정에서는 마을의 동의를 얻어오거나 설명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생산시설은 조용한 농촌마을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생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마을과 우호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마을에 직간접적인 재정지원이나 스폰을 해야 한다.
마을에서 이벤트성인 일을 할 때는 보통 스폰을 받는다. 마을 내에 있는 상가나 기업들도 찬조를 해야 하지만, 고향을 둔 출향인사들도 고향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일종의 준조세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라 주는 사람도 부담이 되지만 요구하는 사람들도 큰 부담이 된다. 마을회관 신축, 향토지 발간, 체육대회, 경로잔치 등 마을의 행사들이 다 비슷비슷하다. 이제는 마을 어떤 행사가 있으면 당연히 입구에 데스크가 있을 것이고, 여기를 지나면서는 뭔가를 납부하고 가야 하는 것은 행사 참여 에티켓이 되었다.
예전 마을의 가장 든든한 재원은 리정세(리운영비, 리정비)였다. 향약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 세대당 얼마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1년에 5,000~40,000원 정도 범위다. 마을의 재정 상태에 따라 이제는 징수를 하지 않는 곳도 있는데, 그래도 아직은 징수하는 마을이 많다. 강제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납부율은 마을마다 차이가 크다. 80%를 상회하는 마을도 있지만 반에반도 납부하지 않는 마을도 있다. 납부율은 마을공동체의 구성원들의 구성 구조, 즉 이주민들이 마을에 얼마나 있는냐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는 데이터이기도 하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이를 둘러싼 갈등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주민이 행정에 민원을 제기하면 경우다. 대부분은 마을과 관련된 일이라 마을에서 해결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주민이 리정세를 납부하지도 않고, 마을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나 홀로 삶을 사는 경우 마을의 협조를 받아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마을이 나에게 뭐를 해준다고 리정세를 받냐"고 주장하던 사람이 어쩐 일로 마을을 찾아왔느냐는 다소 불만섞인 반응이다. 마을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리사무소이기에 마을의 입장에서 보면 내세울 수 있는 주장이기는 하다.
모두 비교 평가가 되기에 안 할 수는 없다.
관계망의 발달로 마을의 소문은 금방 옆동네로 퍼진다. 행사 사진을 관계망에 올리고, 문자를 보내면 실시간으로 전파가 된다. 그러면 일단 단순 비교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젠 옆마을이 했으니 안 할 수는 없다. 구색은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 했는데 마을의 재정상 이 정도 밖에는 할 수 없었다는 설명을 해야지, 아예 안 하면 마을 이장이 무능한 것이 된다.
이제 마을의 행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아니 같다. 어쨌든 남이 하는 것을 나도 하는 것이니 명칭은 거의 같을 수밖에 없다. 온 마을이 모두 경로잔치를 하고 신년인사회를 하고, 체육대회를 한다. 마을제인 당제도 마찬가지다. 같은 읍·면·동안에서의 행사는 리장이나 마을회장들이 모두 참석을 하고, 봉투를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일정을 나누도록 조정을 하는데 할 수 없이 특정일에 집중이 되는 경우는 얼굴만 내밀고 다녀야 한다.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행정의 지원이 필요하다.
분명히 재정확보의 차이라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들이 똑같이 어울리고 똑같이 하려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진다. 맞다 틀리다의 문제보다는 현실적인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 과연 효율적이고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다.
지방자치 시대, 풀뿌리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 중심에는 마을공동체가 있다.
주민들의 자기 결정권을 실현함으로써 주민자치를 이루는 일, 그 전체가 되는 마을공동체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은 다양하고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그 일들을 풀어나갈 마을의 재정이 든든하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는 마을의 그런 문제를 장기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없다.
자치는 자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하라는 게 자치는 아닐 것이다. 행정의 구조를 벗어난 우리 마을들이 제대로 된 자치를 할 수 있는 배려와 지원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