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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둠비, 토성마을의 로컬리티를 엮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공개강좌

by 노고록

마른둠비를 공개적으로 만들어 보는 날이다.

마을이장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대와 의미를 담아 새롭게 시도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마른둠비를 만드는 것은 삼춘 혼자의 기능이자 역할이었다. 필요하면 삼춘에게 주문을 하면 언제든지 만들어준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삼춘의 나이가 구순을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가끔 힘에 겹다는 얘기를 하실 때가 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마른둠비를 마을 고유의 특색을 담은 특화상품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공개강좌라 오늘은 부녀회원외에도 평소에 마른둠비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내비치던 사람들이 모였다.

나이대도 제각각이다. 경로당에 다니는 연세의 삼춘들부터 젊은 다문화 주민들까지 다양하다. 마른둠비를 만드는 것을 처음 본다는 사람도 있고,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 본 듯 옆에서 익숙하게 도와주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예전부터 동네에서는 마을의 대소사에 일손을 더하면서 마을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왔다. 특히 이런 행사는 이웃과 소통하며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이제 마른둠비는 잔칫날만 만든다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펼쳐지는 낯선 광경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때마침 오늘이 추석을 앞둔 마지막 일요일이라 벌초릉 위해 고향방문 길에 나섰던 출향민들이 많다. 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풍경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린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뭐 햄서(뭐 하세요)?"라고 한 마디씩 건네면서 지나간다. "오늘 마른둠비 만들엄시난 이 땅 왕 물두부라도 한 접시 먹엉갑써.." 부녀회장의 정겹게 대답한다.

우리가 뭘 하는지를 왜 물어보는지 캐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동네 사람만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는 이가 관심을 표현하면 몇 마디 덕담이나 간단하게 답을 건네는 것이 우리네 농촌 문화다.


제주 문화 속의 인사말 : "어디 감서?"


제주에서 길 가다 만난 사람들끼리의 첫인사는 흔히 "어디 감서(어디 가세요)?"이다.

이 인사말과 관련해서 오래전에 이주민이 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왜 제주사람들은 오다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행선지를 물어보는지, 마치 사생활 침해처럼 느껴져 불쾌하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의 차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어디 감서(감쑤과)"는 꼭 상대방의 행선지를 물어본다기보다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건네는 일상의 인사말 정도일 수도 있다. "안녕하십니까?" 정도의 인사말로 여기고 그냥 지나치면 된다. 웃으면서 상냥하게 인사말을 건네는 데 익숙지 못했던 옛 어르신들의 문화를 대물림한 것으로 여기면 된다. 물어봤다고 해서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고 다시 돼 묻지는 않는다.

둘째,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은 다른 사람, 모른 사람으로 사생활을 보호해 주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즉, 행선지를 공유하고 있을 만큼 가까운 삼촌 또는 가까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야 서로 일이 생겼을 때 찾아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로컬 크리에이터 시대, 농촌의 새로운 모색


최근 제주 마을에서는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는 지역의 고유한 자연, 문화자원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접목하여 사업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농촌을 활력 있는 삶의 터전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제 농산물은 단순히 농촌에서만 생산되지 않는다. 다양한 시설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됨으로써 전통적인 의미와 농촌의 가치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단순히 밭에서만 나는 농산물 판매로만은 생계유지가 어려워진 현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 방식이 절실해진 것이다. 수년 전부터 시도된 6차 산업이라든지 농어촌체험휴양마을 사업 역시 이러한 변화를 반영했으며, 최근에는 마을여행과 로컬 크리에이터로 그 방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가 미미하다는 점은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있다.


토성마을의 고민과 "마른둠비"의 재발견


토성마을의 고민은 그 역사가 깊다.

그동안 마을은 무언가 변화를 시도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내세울 만한 자연, 문화 자원이나 특산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고려시대 항몽유적지인 항파두리라는 역사 자원이 있지만, 본성(本城) 부분이 다른 마을 지번에 속해 있고 구역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마을 차원의 자유로운 활용이 어려웠다.

궁하면 통하는 법, 이장의 새로운 시각은 그냥 평범하게 지나치던 "마른둠비"에 꽂혔다. 에전부터 마을이 대소사에는 마른둠비가 있었고, 마을에는 그것을 만드는 동네 삼춘이 있었다. 그냥 '마을에 마른둠비를 만드는 삼춘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여겼는데, 새로운 이장의 다른 시각을 통해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이자 고유한 로컬리티를 담은 핵심 자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마른둠비의 가치와 후계자 양성의 딜레마
갓 만들어진 마른둠비, 모양과 색상이 다르다

토성마을은 예전부터 콩재배가 활발했던 중산간 마을로, 먹고살기에 힘들던 생활 속에서 콩을 활용한 다양한 식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마른둠비는 제작에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고, 제주의 고유한 로컬리티를 인증하는 상징성을 가지며, 현대인의 식생활 문화에도 부합할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마을에는 60여 년간 그 기술을 이어온 든든한 삼춘이 있다. 삼춘은 마른둠비를 만드는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 주는데도 긍정적이었고,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활동 중이라 당분간 기술 전수에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따라서 마을에서도 일을 부탁하는데 부담감이 덜했고 편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마른둠비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서 이어나가겠다는 마을 주민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술을 이전받았을 때 마른둠비를 가지고 하는 사업이 경제성, 사업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마을에서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를 않았다. 후임자 또는 전수자가 없다는 냉엄한 현실은 이장님의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고자 마련한 것이 오늘 마른둠비 공개강좌다. 마을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해서 마른둠바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일종의 마을사람을 대상으로 공개 프레젠테이션이다. 당장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마른둠비의 가치를 알리고, 단순히 음식이 아닌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언젠가는 후계자가 나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다. 이장은 마른둠비를 활용한 로컬 크리에이터가 나오기를 바라며, 만약 할 사람이 나선다면 마을에서 가능한 여러 지원을 해줄 생각이라고 한다. 오늘 행사는 그런 분위기 조성의 일환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마을 현장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하물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인 일이야 오죽하겠는가?

사실 로컬이 뭔지, 크리에이터가 뭔지도 확실한 정의가 없는 말의 성찬일 수도 있다.

현장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실제로 감이 와닿지 않기에, 더 어렵고 아리송하다.


토성마을에서 마른둠비에 묻어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 역사성은

마을의 로컬리티이자 마을의 정체성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제 이 로컬리티가 묻어있는 마른둠비를 가지고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찾아 나서는 토성마을의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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