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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마을, 모른둠비 만드는 날..마른둠비의 의미

마른둠비란 무엇인가?

by 노고록

예전 제주의 대소사는

투막한 나무쟁반에 소박하게 담아 내미는 괴기반 한 접시로 시작된다.


쟁반에는 얇고 넓게 썰어놓은 돼지고기 석점, 메밀가루로 버무려 속을 채운 제주식 순대 한점, 그리고 집에서 재배한 콩으로 만든 목에 걸릴 것 같은 모른둠비 한 점이 전부다. 괴기반은 대소사 때 집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인당 딱 1 접시씩 주어진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분물 한다. 동네 훈장 어르신도 한 접시, 동네 꼬마 녀석도 한 접시다. 이 괴기반 힌 접시의 처분권은 전적으로 반을 받은 사람에게 있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면서 함께 먹는다. 가끔은 먹지 않고 받아가는(포장해 가는) 사람도 있고, 옆에 아는 지인에게 나누어 주는 경우도 있다. 후자를 "반 받아 준다"라고 하는데, 동네 어른이 불러서 괴기반을 받아주는 날은 종일 자랑거리가 되던 시절이다.

괴기반 1 접시, AI생성 이미지


괴기반 한 접시를 채우기 위한 음식은 온 마을사람들의 땀과 정성의 결정체다.

돼지고기 석점과 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을 남정네들이 모아져야 하고, 모른 둠비를 만드는 일은 아낙네들이 들어서야 한다. 이 둘은 일손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다. 마을에 대소사가 발생하면 마을에 있는 전문가의 지휘아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일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 경조사 때마다 온 동네가 들썩이던 제주 수눌음 경조사 문화의 결정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동네에서 돼지 추렴은 불법이 되었다. 마을제를 지낼 때 사용할 통돼지도 직접 마을에서 준비할 수 없다. 운수 없는 날에는 불법도축으로 과태료를 물어야 할 수도 있다. 소정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은 그만큼 편해졌다. 이제 돼지고기와 순대는 주문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시간 맞추어서 가져다준다. 제주의 전통두부인 모른둠비는 사라졌다. 모양과 이름만 비슷한 짝퉁두부만 유통 중이다.


모른 둠비의 맛을 일반 두부와는 많이 다르다.

물이 많아서 손으로 잡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지는 요새 두부와는 달리 모른둠비는 말 그대로 마른 두부다. 손으로 잡아도 단단하다. 일부러 물을 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수분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냥 먹으면 목이 메일 정도라 김치에 싸서 먹으면 맛이 배가된다. 손으로 빠개면 부석 부석하게 쪼개진다. 어린이나 젊은이들이 먹기에는 거북하다고도 한다. 그러기에 "맛이 좋다"라고 먹으면 "당신도 이젠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말을 건네주곤 한다. 씹고 나면 고소한 뒷맛이 은근하게 오래간다. 여운이 있는 맛이다. 건강해지는 맛이기도 하다.



60~70년대 경조사 때 고향에 가면 모른둠비가 있는 괴기반을 받았다. 이때 모른둠비를 직접 만들던 마을 어른들은 나의 할머니 세대로 지금은 대부분 작고하셨다. 그때 어른들을 보조하면서 눈 넘어 익힌 세대가 지금 80살이 넘었다. 모른둠비를 만드는 기술을 직접 경험했던 마지막 세대가 된다.

모른둠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격적으로 사업화되지 않고 있다. 오래전 내도동에 모른둠비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후속 사업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단지 도내에 "XX둠비"와 같이 비슷한 이름으로 생산유통하는 업체는 있다. 간혹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둠비라는 이름 때문에 제주의 전통 모른둠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모습과 맛이 많이 다르다. 모른둠비를 만드는데 필요한 콩과 해수는 제주의 지천에서 구할 수 있는데 쉽게 사업화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사업성 때문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고성1리, 토성마을에는 지금도 모른둠비를 만드는 구순을 바라보는 삼춘이 있다. 어린 시절 제사 많은 어머니가 늘 하시던 둠비 만드는 일을 곁눈으로 배웠다고 한다. 불을 피우면서 살아야 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둠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장을 차려놓고 판매하거나 대량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동네 일이 있을 때 주문을 받아서 만들어주는 정도다. 지금도 건강하기에 주위에서 주문이 들어오거나 마을잔치 때 필요하다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손을 걷어붙인다.

삼춘은 둠비 만드는 기술을 누군가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직 마을에서 이 기술을 본격적으로 전수받겠다는 사람은 없다. 가끔 상업적으로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은 있지만 삼춘은 관심이 없다. 단지 마을에 맛과 기술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이 마을에는 모른둠비에 미친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모른둠비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반드시 마을에서 누가 전수를 받아서 마을의 특화상품으로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마을이장이다. 몇 해 전 이장이 되고부터는 매년 모른둠비를 테마로 잔치를 하고 있다. 잔치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아니고 삼춘이 두부를 만들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먹거나, 주변 사람들이 모여서 체험을 하는 정도다.



오늘은 마을회관에서 부녀회와 관심 있는 마을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스불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모른둠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삼춘의 집마당에서 장작불을 이용해서 혼자서 만들던 전통방식을 벗어난 첫 외출이다. 모른둠비는 솥밑에 눌지 않도록 장작불의 강약을 조절해야 하는데 가스불에서도 가능한지와, 여러 사람들의 협업으로 하는 게 효율적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물론 많은 분들의 공감대를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 행사는 부녀회원들이 중심이고, 마을에서 관심 있는 분들도 동참하기로 했다. 몇 번의 마을행사 때문에 모른둠비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던 분들도 있지만, 처음으로 구경 아닌 참여를 하는 분들도 있다. 말 그대로 마을잔치이자 공개수업이다.


회관이 대로변이라 때마침 벌초를 위해서 마을에 왔던 사람들이 오가면서 말을 건넨다.


"오늘 무슨 잔치라.." , "둠비 만들엄시나 이 땅 왕 한 점 행 갑써.."

오가는 말투가 그 옛날 마을잔치를 하기 위해서 마른 둠비를 만들던 어느 날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 분위기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나 말과 힘을 보태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던, 그래야 우리 마을이 같이 살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어서 2화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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