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다시 믿기까지

젊음이 던져준 용기

by 이랑

열한 살의 가을, 기적이 되기까지


아홉 번째 이야기

몸을 다시 믿기까지
-젊음이 던져준 용기



스무 살의 봄.

내 삶은
다시 앞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남았고,
이제는 스스로 살아가는 쪽으로
발을 내딛어야 했다.

유아교육과를 택한 건
내 인생의 수많은 선택 중에서도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였다.

전공 공부는 이상하리만치
너무나 재미있었다.

늘 교수님이 잘 보이는
가까운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었고,
교수님 눈에 들기 위해 애썼다.

시골에서 올라간 내가
용감하게도 과대표를 했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좋았고,
오히려 그 자리에 서야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그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자들만 가득한 유아교육과에서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관계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과대표로 학교 행사를 준비하며
대학교 체육대회에도
몸을 던지듯 참여했다.

그 무렵부터
몸은 조금씩
불안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날,
난 쓰러졌다.

여전히 나는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치며
나는 잠시 학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럼에도 결국 다시
유아교육과로 돌아왔고,
1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다시 시작한 대학생활은
나를 더욱 공부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다.

고시원 사방 벽면에는
전공 공부에 대한 내용만
빼곡히 붙여 두었고,
잠들기 전까지 공부를 했다.

며칠 밤을 새워 교구를 만들고
과제를 완성해 가는 시간들은
단지 잠만 부족했을 뿐,
내가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쏟아붓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과수석’ 이라는 성적으로 답해주었다.

대학 등록금조차 큰 부담이었던 나에게
전액 장학금은
부모님의 어깨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는 선물이었다.

.

그리고 나는
굉장히 무모하지만
대담한 선택을 해보기로 한다.

바로
약을 끊는 것.

도시에서 혼자 자취하며
대학병원을 오가는 일은
내게 너무 큰 부담이었고,
현실적으로
계속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내 몸을 믿어보기로 했다.
십 년 가까이 함께했던 약을
과감히 끊기로 결심했다.

젊음이 던져준 용기였을까.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나는 괜찮아진 것이 아니라
괜찮아지기를 선택했던 것뿐이었다.

.

아직 나이만 어른이 된 내가,
타지에서 홀로 견뎌내기에는
외롭고 버거운 시간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서점을 찾았다.

바닥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서점은 내 숨이 가장 편안해지는
휴식처 같은 곳이었다.

.

대학교 부속유치원 실습과
졸업작품전을 마치고
내 손에는,
유치원 교사 자격증이 주어졌다.

이제부터는
진짜 내 아이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초임 시절의 나는
열정만큼은 넘쳤지만
실수투성이였다.

같은 연령대 두 반에
주임 선생님과 초임인 내가 배치되었고,
학기 초 학부모님들은 나를 잘 믿지 못했다.
비교와 불만 어린 전화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1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학기가 시작할 때면
며칠 밤을 새워 환경 구성을 했고,
아이들 한명 한명을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수많은 교재·교구를 만들고
수업 연구를 해가며,
아이들의 하얀 도화지같은 마음에
알록달록 예쁜 그림과 색깔이
가득 채워지길 바랐다.

그렇게 1년을 마칠 즈음에는
우리반 아이들뿐 아니라
학부모님들로부터도
신뢰와 사랑을 듬뿍받는 교사로 성장해있었다.

한번씩 몸이 고될 때마다
몸에서 무리라는 신호가 오긴 했지만,
내 몸은 견뎌주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내 안의 ‘긍정의 힘’이었다.

나는 그 힘을 선택했고,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은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새벽에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도
출근을 했다.
당시엔 대체 인력도 없어
많은 교사들이
그렇게 일하던 시기였다.

매년 2월이면
헤어짐의 시간이 찾아왔다.
졸업식마다 아이도, 학부모님도
나도 같이 울었다.

넘치게 받은 꽃다발과
정성스레 써 내려간 손편지,
그리고 선물들은
내가 교사로서 잘하고 있다는
증표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이 거듭되며
나도 어느덧
내 교실에 실습생을 맞이하는
베테랑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몸을 전혀 살피지 않고
그저 일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약에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내 몸을 더 믿고
단련시키는 쪽으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내 마지막 20대인
29살 가을.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

처음엔 1km는 커녕,
500m 조깅도 힘들었다.
평생 달리기를 해본 적 없는 나에게
달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점 속도를 붙일수록,
거리를 늘려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는게 느껴졌다.

그렇게 빨라지는 심장박동은
내게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이었다.

두 다리로 뛰고,
두 팔을 휘젓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모든 순간을 통해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온 몸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달리기를 하면 할수록
대회에도 나가고 싶어졌고,
혼자가 아닌 모임에 참여해서
사람들과 함께 달리고 싶어졌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렇게 가입한 첫 러닝 크루에서
내 평생의 반쪽을 만나게 될 줄은.




ⓒ 이랑
이 글은 개인의 기록입니다.
허락 없는 복제, 배포, 가공, 인용을 금합니다.
인용 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