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신부가 되다.
열한 살의 가을, 기적이 되기까지
마지막 이야기
사랑으로 이어진 계절
-가을의 신부가 되다.
가을은 늘 나의 시작점이었다.
그 계절 안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건
나의 기대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대회장의 뜨거운 열기,
함께 달리는 숨 가쁜 호흡,
남녀노소를 불문한 열정과
서로를 향한 응원,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살아있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늘
내 곁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가까워진 모임 사람들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을 함께했던 그날,
첫차가 뜨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에서
그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이미 여러 번의 연애를 거친 뒤였고,
이제는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말했다.
“그럼 결혼할래?”
그렇게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내게 왔다.
대회장에서 처음 나를 보았던 날
첫눈에 반했다고,
나중에서야 편지로 그 마음을 전했다.
말보다도 마음이 먼저 닿았던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시골 고향집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100km의 거리를 두고 연애를 해야 했다.
고속버스터미널은
주말마다 우리가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나를 위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었다.
내 호흡을 가장 잘 살피면서
나의 발걸음에 맞춰 곁을 지켰다.
그리고 더 가볍게,
더 빠르게 달리는 법에 대해 알려주고
느긋하게 기다리며 이끌어주었다.
또 내가 가진 아픔까지도
그것 역시 나의 일부라며
고스란히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언제나 요동치는 파도였고,
그는 늘 잔잔한 바다였다.
우리는 서로 너무도 달랐지만,
그게 마치 퍼즐조각처럼 딱 맞았다.
그렇게 함께 수많은 거리를 달리고
남들처럼 뜨겁게 연애한 지 2년,
그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빛나는 다이아반지를 내밀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했다.
.
2018년 가을,
눈부시게 빛나는 그 계절에
나는 가을의 신부가 되었다.
‘신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더 이상 고속터미널에서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고,
아침에 나가도 저녁이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 된
이 사람의 얼굴을 쏙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졌다.
나는 또 다시
내 몸을 믿어보기로 했다.
우리는 아기를 갖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운동했다.
달리고, 수영도 하고,
필라테스도 하며
이 몸이 한 생명을 품기에
단단한 엄마의 몸이 되도록
다지고 또 다졌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던 1년,
결과는 두 줄이었다.
아기는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예정일을 하루 앞둔 날,
양수가 터졌고
출산 가방을 챙겨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임신과 출산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나지만,
그때의 나는 자신이 있었다.
자연분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산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응급 제왕절개로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내가 아스피린 장기 복용자라는 사실을.
수술 후 지혈이 쉽지 않았고,
담당의는 당황했다.
후처치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그럼에도 내 몸의 상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어난 아기가 무사하다는 것,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처음 아기와 볼이 맞닿았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심장이 뜨거워진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
열한 살의 가을을 건너온 내가
이제는 한 아이의 계절이 되었다.
기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 아이는
이제 기적을 품에 안은
엄마가 되었다.
.
가을은 여러 번 나를 불렀다.
이 땅에 태어나라고 부른 가을,
가을의 하늘로 부르던 가을,
다시 살아보라던 가을.
열한 살의 가을이
나를 살렸다면,
이제는 이 아이가
나를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
그때의 심장은 여전히 나를 데려가며,
나의 가을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번 가을은 또 어떻게 나를 부를까.
기적처럼 삶은 이어진다.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어지는
삶의 방식이었다.
당신의 계절에도
기적이 머물기를.
1998년,
저에 대한 기록과 연구가
담당 교수님의 논문에 참고 자료가 되어,
이후 학회에 발표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건너온 아픔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고,
이 땅의 많은 천사들을 살리는데
작은 보탬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작가의 말.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 써 내려오며
저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다시 문장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열한 살의 가을에서 시작된 시간은
아픔의 계절을 건너, 사랑을 건너,
엄마가 되는 자리까지
저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자 합니다.
스치는 바람결이 포근해질 무렵,
엄마가 된 이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려 합니다.
기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엄마가 된 지금의 시점에서
조금 더 솔직한 문장을 건네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이 계절을
건너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봄에 뵙겠습니다.
- 이랑 -
ⓒ 이랑
이 글은 개인의 기록입니다.
허락 없는 복제, 배포, 가공, 인용을 금합니다.
인용 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