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야 나야, 선택해
헤어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연애기간 동안 차곡차곡 쌓인 '무언가' 때문에 점진적으로 이별에 도달하거나, 혹은 찰나의 사건이나 감정 때문에 충동적으로 맞이하거나. 내 경우 딱 떨어지게 한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없지만, 점진적으로 쌓인 '무언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던 것 같다.
"오빠는 나보다 오빠 강아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아무런 예고 없이 튀어나온 이별 사유에, "내가 오빠를 더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괜찮지만, 나만 좋아하는 건 안 괜찮아."라고 부가 설명을 달았다.
대부분의 이별이 그러하듯, 그와 이별한 날은 잠들기 직전까지 헤어진 게 맞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후회스러워 돌이키고 싶은 건지,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길 잘했다는 안도하는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아내느라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밝은 해가 뜨니 전날 일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하루를 어찌어찌 보내고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 저녁 무렵 무작정 공원으로 갔다. 아침, 저녁으로 자주 달리러 왔던 곳. 한 바퀴를 돌면 정확히 0.75 마일이 찍히는 곳. 같이 저녁을 먹고 소화시키자며 함께 걸었던 곳이기도 했다.
뛸 힘도 의지도 없어 무작정 한참을 걸었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봤다. 왜 우리는 헤어짐을 선택했는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오목조목 따져봤다. '그의 반려견을 향한 내 유치한 질투심'이라고 단순 요약하기엔 난 좀 억울했다. 작은 강아지 옆도 지나가지 못해 길을 건너는, 아주 심각한 ‘개 공포증’이 있던 나였다. 29년 간 갖고 있던 공포증을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몇 달 만에 이겨낸 것 또한 나였다. 그는 반려견에게 쓰는 에너지, 돈, 시간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내게 쓰는 건 아끼려 했다. 피곤해도 강아지 산책은 절대 빼먹을 수 없지만, 여자친구와 한 약속은 쉽게 잊었다. 며칠 못 가 망가져버리는 강아지 장난감은 쉽게 사면서, 내가 먹으러 가자고 하는 음식은 가격부터 따졌다. 철저한 더치페이와 데이트 예산을 지켜오던게 무안했다. 처음과 달라져가는 이런 모습이 당황스러웠고, 그 인색함은 상처가 됐다. 나는 개를 안 키워봐서 모르는 거라며 비교하지 말자 여러 번 다짐했다. 하지만 이해한 척 넘어가니, 내 안에서 소화가 안 돼 억울함만 커졌다. 내 이상형과 거리가 멀어도 아무 상관없다 했던 마음이 요동쳤다. ’개 공포증‘을 이겨냈듯,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상관없다 했던 것들이 이제는 상관있었다. 그렇게 나도 처음과 달라져갔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맞아.”
내 이별통보에 서툰 한국말로 답하던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께 물어봤다. 이렇게 헤어질 거였으면 왜 처음부터 시작하게 내버려 두셨냐고, 성공한 연애는 결혼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럼 나는 왜 또 실패한 거냐고 따져 물었다. 친구가 물었다면 너무 쉬웠을 질문인데, 스스로에게 답하려니 마음 비뚤어진 사람처럼 답이 안 났다.
한참을 걸은 그날 이후, 매일 출석도장 찍던 달리기를 며칠간 쉬었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후회와 안도를 오갔다. 홀로 가만히 방에서 슬픔을 곱씹기엔 일터가 나를 계속 불러냈다. 웃는 얼굴로 비행을 하고 호텔방에선 엉엉 울다 잠들었다. 다음 날 부은 눈을 하고 또 일을 했다. 아직 내 맘은 슬픈데 웃으려니 에너지가 두배로 들었다. 에너지는 두배로 쓰는데 입맛이 없어 며칠새 살이 이키로나 빠졌다.
습관처럼 그의 ‘Strava’ 계정을 들어갔고, 그는 지난 일주일 간 평소와 다름없이 달렸다는 걸 알았다. 마치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연인과의 이별은 일상생활에 그 어떤 지장도 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이없지만 이별해서 슬픈 그 와중에도 승부욕이 튀어나왔다. 내 눈치 없는 승부욕은 오기로 이어졌고, 나 또한 이별이 일상에 코딱지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일주일 만에 공원으로 다시 나갔다. 달려야 했다.
그날 나는 3.1마일(=5km) 달리기 신기록을 세웠다. 평균 페이스, 마일 당 10분 26초, 처음 보는 숫자였다. 오기라는 조금은 잘못된 동기였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담. 집에 돌아오는 길, 그에게 텔레파시라도 보내듯 혼자 중얼거린다. 거봐 나도 아무렇지 않지. 이렇게 달리기 신기록도 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