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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19. 2023

9. 새로운 사람, 제프씨

나는 사실 금사빠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죠." 온라인 데이팅을 시작 할 수 있게 용기와 함께 약간의 바람을 넣어줬던 직장 동료가 말했다. 전날 밤 달리다 말고 어플을 깔았고, 그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까지 솔직히 다 털어놓은 후였다. 요동쳤던 감정을 다음 날 밝은 해 아래 비춰보니 현타가 왔다. 나의 불안정함을 털어놓은 게 수치스러우면서도 속 시원했다. 내 혼란스러움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녀가 더욱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럼 00씨도 새로운 사람 만나버려요. 그러면 되겠네. 사람으로 잊는 게 뭐가 나빠. 그쵸?" 그렇게 나는 달리기와 잠정적 이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만남을 찾아 떠났다.


'이 사람도 아니야.' 서너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그렇게 '첫 데이트'만 반복하는 게 다시 지겨워질 때쯤,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초면에 이름 부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제프라고 부르기엔 우린 서로가 아직 낯서니, 제프씨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제프씨는 어느샌가 젶씨라는 닉네임으로 바뀌었고 첫 데이트 이후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영어가 더 편하지만 한국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점이, 그를 시험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난해한 토픽에도 대화가 잘 통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능구렁이 같으면서도 그 속내가 쉽게 드러난다는 점이 싫지 않았다.


네 번째로 만나 데이트하던 날, 저녁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공원에 가서 걷자고 제안했다. 십 분 정도 나란히 서서 걸었다. 벤치가 나왔을 때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앉자고, 이번엔 제프씨가 제안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니 마주 보고 앉자고 하며. 공원에 오기 전 카페에 들러 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양손으로 쥔 채 덤덤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한 달간 어떤 마음으로 이 만남을 이어왔는지, 지금은 어떤 맘인지, 내 마음은 어떤지를 차례로 이야기하고 물어왔다. 그날의 대화는 이 페이스 그대로 서로를 좀 더 알아가 보기로 마무리 됐다. 어떠한 큰 장애물만 없다면 이대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것 같았다.


그 데이트 이후 우리는 종종 자기 전 통화를 했다. 가벼운 이야기보단, 서로의 가치관이나 이전의 경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가 더 많았다. 긴 통화를 하고 잠드는 날이면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에 취해 잠들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다'가 맞는 말 같긴 한데, 맞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이었다.


며칠 후 연인 사이에 중요한 것들에 대해 또 깊은 대화가 오고 갔다. 그리고 서로가 타협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어떤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서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게 달라서였는데, 둘 중 하나가 꺾이지 않으면 이 관계는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 별 다른 질문 없이 내 이별통보에 수긍하는 그 모습에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받았다. 내가 찬 건데 차인 기분이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질 않아 집에 돌아와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바로 수긍을 했냐고 굳이 전화해 물어봤다. 그의 답변은 너무나 명쾌했다.

"We really like each other but deep inside, we both know it's not gonna work out."

우린 서로를 너무 좋아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이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 그 명쾌한 한 문장에 말 문이 막혀 알았다며 전화를 바로 끊었었지.


결국 나와 제프씨는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 관계에서 얻었던 일시적인 만족감과 즐거움을 나무라고 싶진 않았으나,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꽤나 쓰렸다. 전 남자 친구에게 전화해 물어보고 싶어졌다. 좋아하는데도 결국 헤어짐을 예상하게 만들었다는 그게 도대체 뭐였는지. 평소 궁금증 해소 의지가 매우 크고 강한 나지만 기특하게도 연락해 묻진 않았다. 물어보지 않을 용기를 냈다. 이제와 물어보는 게 의미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그때도 미처 묻지 못했던 게 아니라, 사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을 용기를 낸 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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