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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15. 2023

8. 판도라의 상자

그리고 도미노 효과

인간의 호기심은 얼마나 위대한지. 어릴 적 재밌게 봤던 ‘호기심 천국’이라는 프로그램 영상이 유튜브에 떴다. 물로켓을 만들어 몸에 달고, 대형우산을 만들어 한강에서 점프도 한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발명품이 어떻게 호기심에서 시작됐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이 호기심은 때때로 어마무시하게 파괴적이기도 하다. 얌전히 묻어둬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굳이 파헤치게 둘 땐 더더욱.


낮엔 너무 더워 달릴 수 없는 날이었다. 저녁 아홉 시가 다 되어 공원으로 나갔다. 화씨 100도에 육박하는 낮에 비해 선선해진 밤공기가 위로처럼 다가온다. 여김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 오분쯤 달렸을까.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어졌다.


’그 사람은 어플을 다시 깔았을까?‘


나는 그 사람과 데이팅 어플로 만났다.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가볍게 만나는 거 아니냐" 혹은 "모르는 사람인데 위험한 게 아니냐"며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데이팅 어플을 해봤다면 알 거다. 온라인으로 짝꿍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번거롭고, 인내가 필요하며, 정성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지. 그렇게 만난 우리였으니, 헤어진 후 상대방이 다시 ‘on search’ 모드로 돌아갔는지 궁금한 게 당연하지 싶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돌아갔다는 걸. 그리고 그걸 내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극대노와 슬픔이 나를 덮칠 거라는 것도. 그래서 꾸역꾸역 열고 싶은 마음을 눌러뒀었다. 그날, 그 시각, 그 공원에서 살아난 내 위대한 호기심은 터지기 직전이었던 내 마음속 풍선에 바늘을 꽂아버렸다. 펑.


달리기를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빛의 속도로 어플을 다운받았다. ‘확인만 하는 거야. 확인만.’ 3개월이란 시간이, 나를 포함한 그에게도 새로운 이를 만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되뇌며, 익숙하게 프로필을 완성했다. 빠르게 사진을 올리고 성의 없이 문답을 채워나갔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을 선택하고, 그의 나이로 필터를 걸었다. 화면을 두어 번 스크롤하니 익숙한 얼굴이 바로 나왔다. 심지어 내가 찍어준 사진이 떡하니.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슬픈 노래를 들으며 달리는데,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연락해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겐 그럴만한 명분과 권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뭘 잘못했고 뭐가 무례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 차를 몰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건강한 방법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의 호기심으로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도미노처럼 다 무너진듯했다. 열지 말 걸 그랬다. 궁금해도 좀 더 참을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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