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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20. 2023

10. 조금 더딘 온전한 이별

성격 급한 내겐 좀 많이 힘들다

이별 한 지 반년이 흘렀다. 20대 후반에 접어들고 가장 긴 6개월이었다. 일기장에 '놓치고 있었으나 회복하고자 하는 것들'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리스트를 적어 내려갔다. '8. 운동'까지 적고 다시 한번 훑어보니 8번은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나 그래도 달리기는 열심히 했는데'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8번 항목을 지우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온전히 내 몸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애 때는 상대방이 일순위였고, 헤어지고는 슬픔 극복이 일순위가 되어 놓치고 있던 게 참 많았다. 읽고 싶어 잔뜩 사두고 한쪽에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 중, 마침내 한 권을 집어든 느낌이었다.


한동안 출석이 뜸했던 헬스장에 다시 나갔다. 시작은 '건강한 감정 해소'였으나, 점점 강박이 돼버린 달리기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웨이트로 근육을 너덜너덜하게 다졌고, 천국의 계단을 오르며 유산소 운동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리고 싶은 날엔 또 그 나름대로 열심히 달렸다.


Strava 어플은 삭제했다. 삭제하기 전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그의 계정을 구경했다. 드라마처럼 스크롤을 내리다 실수로 하트를 눌렀고, 한 번 눌린 하트는 취소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삭제하려고 했으니깐 괜찮아"라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재빨리 내 계정을 삭제했다. 내 달리기 기록이 사라진다는 게 아까웠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추후 같은 계정으로 로그인하면 데이터가 복구된다고 안내 메시지가 떴다.


이별 플레이리스트를 대신할 새로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잠시 고민 후 이름을 '요즘 이거'라고 붙였다. 자주 듣는 찬양부터 좋아하는 드라마 OST, 내 노래방 18번 곡들까지 모든 장르가 골고루 담긴 편견 없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러다 대뜸 슬픈 노래가 듣고 싶으면 다시 이전에 듣던 노래를 찾아들었고 슬픔에 잠겨있기도 했다.


일상에 큰 변화가 일었다고 느꼈는데, 사실 거창하거나 새로운 걸 시작한 건 아니었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할 것과, 아직 좀 더 유지해도 될 행동을 구분 짓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전자의 예시로는 '연애 시절 나눴던 다정한 문자 읽으며 추억 회상하기'가 있었고, 후자의 예시로는 '갑자기 그리운 마음에 슬퍼지면 다그치지 않고 슬퍼하기'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고통스럽게, 괴로워하며, 더딘 시간을 탓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그때가 오길 기대하기로 했다. 이 의지적 결단의 힘이 얼마난지, 일상 속 소소하게 하고 싶은 일들이 계속 생겨났고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처음 그를 만났던 가을이 돌아왔다. 나는 아직 종종 그를 생각한다. 하지만 그를 생각한다는 말이 그와 재회하고 싶다거나 그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자신은 헤어지고 나면 연애기간의 두 배만큼을 이별 극복기로 지정한다고 했다. 그러니 조금 더 극복하는 중이여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을 핑계 삼아 나는 내 극복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기로 했다. 뭐든 성급하게 해결하려 하면 어딘가 어설프기 마련이기에. 다음 연애를 위해서라도 온전히 극복하고 싶어졌다. 마음속 상처로만 남는 게 아니라, 이 연애와 이별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도록, 그래서 성장하고 다듬어지는 시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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