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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변 Sep 14. 2024

모교에 돌아와 변호사로 일하다

프롤로그

계절의 변화는 늘 이렇게 당혹스럽다.


얼마 전 브런치를 열어 '최장 열대야' 이야기를 하며 '올해부터는 쭉 여름만 계속되는 게 아닐까?'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날 갑자기 선선해졌다. 뭐지? 아침에 눈떴는데 왜 덥지가 않지? 심지어 점심먹으러 나가는 길에도 특유의 뜨겁고 습한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갑자기 여름이 끝난다고?


급기야 며칠 전부터는 자연대 앞 은행나무들이 미묘하게 노릇한 빛을 띄기 시작했다. 이쯤되니 약간 체념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래. 오고 말았구나 가을이. 아침 라디오 진행자가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틀어줬다.


가을을 싫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학교 풍경은 모든 계절에 나름의 멋이 있지만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 다만 시간이 이렇게까지 빨리 흐르는 게 당혹스러운 것 뿐이다.


여름이 끝난다는 건 방학이 끝난다는 뜻이기도 한데, 학교 직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이벤트다. 직원들은 방학 때도 매일 출근하는데 개강한다고 달라질 게 뭐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가 않다. 개강과 동시에 출퇴근길 교통 체증도 함께 돌아오고, 점심 땐 식당마다 줄이 길게 늘어선다. 방학 동안 한산했던 교내 카페도, 쾌적했던 교내 헬스장도 이젠 안녕. 캠퍼스 어딜 가나 인파가 넘친다. (다만 의대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 학기를 맞아 동아리 소개 행사가 벌어졌다. 잔디밭에 줄지어 선 흰 천막 아래 저마다 부스를 차리고 동아리 소개에 열심이다. 얼마 뒤엔 가을 축제도 하고 야외공연도 종종 할텐데, 공연 소음이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조차도 사실 싫지는 않다. 드물게 랩과 헤비메탈 무대가 있을 때만 헛웃음을 지으며 "오늘 업무는 여기서 마무리할까요"라고 농담을 주고받을 뿐이다.


20여년 전 이 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이맘때쯤 뭘 하고 돌아다녔더라. 저 동아리 부스 중 하나에 나도 있었더랬다. 축제 때는 저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도 꽤 마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변호사가 될 줄은 몰랐고, 모교에서 변호사로 일하게 될 줄은 더욱 몰랐다. 전공 불문하고 다들 하나둘 사시 공부를 시작하는 세태를 내심 한탄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돌고돌아 나도 결국 법조인이 되고 보니 새삼 마음이 겸손해진다.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뭐든 함부로 단정짓지 말아야겠다.


집에서는 초딩 아들을 키우고, 학교에선 직원으로 일한다. '교직원'은 교수·강사 등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원(敎員)'과 그밖에 학교의 여러 사무를 처리하는 '직원(職員)'으로 나뉘는데, 학내에서 법률자문과 소송 등을 맡는 변호사는 보통 '직원'으로 고용된다. 일응 평온해보이는 일상이지만 들여다보면 마냥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살면서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들을 기록해보려 한다.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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