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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귀복 Jun 14. 2024

묘비명을 자랑하는 남자

인티제(INTJ)도 사랑을 합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사과나무를 심을 것인가?"


나는 가족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내의 갈색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7살 딸아이와는 거실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백 번 정도 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해 보면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님을 쉽게 깨닫게 된다.





천사 같은 아내와 날개는 없지만 본인이 천사라고 굳게 믿는 딸이 있어 이승이 곧 천국이었던 남자.



내 묘비명이다. 얼마 전에 써서 아내에게 전했다. 쓰나미급 감동에 눈물을 뚝뚝 흘릴 거라 예상했지만 실패다. 전직 문학소녀의 낭만이 살짝 부족한 듯싶다. "자기 묻힐 땅이나 있어? 화장해야지"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그렇다. 내게는 아직 묻힐 땅이 없다. 급히 노선을 수정하여 "그럼 화장하고 납골당에라도 넣어 줘. 유골함에라도 꼭 쓸 거야"라한다. 대답을 들은 아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다. 납골당 비용도 부담일 수 있으니 그때까지 부지런히 벌어야겠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랑꾼이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 번뿐인 인생, 낭만 가득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내 묘비명은 확실히 정했어!"


용돈 인상 요구만큼이나 비장한 발언에 헛웃음을 짓던 아내의 표정이 슬며시 바뀐다. 입꼬리의 위치가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쇼핑백을 들고나올 때와 같아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내 묘비명이 마음에 쏙 드는 게 확실하다.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아냐고? 10년을 넘게 같이 살았다. 6년 반 연애까지 더해지면 20년이 코앞이다. 이제 그 정도는 안다. 잠시 후 현명한 아내는 "묘비명에 적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지금 행복하게 지내자"라고 덧붙인다. 맞는 말이다. 풀이 살짝 죽은 채로 "응, 그래" 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이러나저러나 12년 차 부부는 오늘도 알콩달콩이다.  


"사랑은 언제나 정(情)을 이긴다."


사랑꾼 남편의 선언 덕분에 30대 후반이 된 아내가 20대 초반에 보이던 상큼한 에너지를 저녁 내내 발산한다. 역시 "부부는 정으로 사는 거야"라는 말은 내게는 남의 이야기가 분명하다. 나는 매일 사랑으로 산다. 천사 같은 여인과 함께 있으니 거실이 천국처럼 느껴진다. 당신도 이승에서 천국을 경험하길 원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천사라고 생각해 보자.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더욱 환해진다.



행복은 어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트 휘트먼'이 남긴 말이다. 이 문장이 당신 가슴에도 볼드체로 진하게 새겨지길 바란다.



누구처럼? 나처럼.



천사같은 아내와 본인이 천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딸과 함께


아무튼, '묘비명'마저 '러브레터'로 만들어 버리는 나란 남자. 가히 '인티제(INTJ) 사랑꾼'이라 불릴만하다.





비하인드 스토리


유난히 주의가 산만한 나는 커피를 종종 옷에 흘린다. 그럴 때면 아내와 딸은 동시에 "괜찮아?" 고 묻는다. 두 모녀의 다정한 걱정속상함도 잠시, "응, 괜찮아. 옷은 있다가 빨면 돼" 하고 답한다. 누가 봐도 언짢은 일이 발생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는 순간이다.

"인티제는 생존을 위해 진화가 필요하다."

다음 날, 아내가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외출을 준비한다. '본능'을 이긴 '습관'이 "우와~! 예쁘다"라고 반응하며 숙주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잠시 뒤,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던 아내가 커피를 옷에 쏟는다. 늘 그렇듯 7살 딸아이는 "엄마, 괜찮아?" 하고 묻는다. 그런데 이때, 남편이 잠깐 정신 줄을 놓는다. '본능'이 '습관'을 이기도록 내버려 둔다. 평소보다 두 배 더 커진 눈동자가 아내의 얼굴 대신 원피스로 향한다. 호들갑을 떨면서 "조심하지. 얼마나 쏟았어?"라고 다그치듯 묻는다. 인티제 남편은 이렇게 또 스스로 무덤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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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보다 '상황 파악'이 우선인 나란 남자. 묘비명을 미리 준비해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흑흑.



P.S. '월트 휘트먼'의 명언은 키즈엠 출판사의 <어제를 찾아서>에서 발췌했습니다. 아이의 그림책에서도 반짝이는 문장을 만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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