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시작 전, "아빠 왜 나만 양보해야 해?"라고 질문하는 7살 딸에게 답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하나를 주면 나중에 두 개를 받으니까"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조금 베푸는 제게 늘 넘치도록 나누어 주시는 구독자님들 덕분에 세상이 아직 따뜻함을 배웁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인티제의 사랑법>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TV를 켜지 않고 아이와 지내는 게 가능할까?”
자녀를 위해 거실에 TV를 없앴다는 지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럼 무슨 재미로 살지?’, ‘진짜 독하네’라는 등의 생각을 했다. TV를 ‘바보상자’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TV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이제는TV를 끄고 지낸다. 커다란 화면 대신 아이의 작은 눈을 바라본다. 덕분에보이지 않던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서아야, TV가 고장 났어. 당분간 뽀로로는 못 봐.”
2년 전, 5살 어린 딸에게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심하게 흔들리는 아이의 눈동자를지금도생생히 기억한다. 건전지가 빠져 가벼워진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며 전원이 켜지길 기대하는 아이를볼 때마다 부모로서의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 TV는 언제 고쳐?”라고 해맑게 물었다. 그때마다 “고쳐 주시는 아저씨가 일이 많으셔서 늦어지시나 봐”라는 거짓말을 했다. 나 역시 뽀로로를 틀어주고 편하게 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보람과보상이 따르니견딜힘을 얻었다. 다행히 TV를 켜지 않고 지내는 것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아빠, 아저씨는 언제 와?”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 주기도 조금씩 길어졌다.
“영상 매체가 육아 치트키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태블릿 PC는 유아차만큼이나 중요한 육아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고, 요즘 아이들은 터치 화면으로 손가락 감각을 익힌다. 이 추세면 ‘모니터 일체형 유아차’가 출시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며 TV가 꺼진 채로 육아를 한다. 총탄이 날리는 전쟁터에서 홀로 칼을 빼들고 비장하게 전장을 누비는 병사가 된 심정이랄까? 아무튼, 부모의 고군분투 덕분에7살 딸아이는 식당에서 스마트폰 없이도 밥을 잘 먹는다. 거실에서는 TV를 켜는 대신 그림책을 펼친다. 이따금씩 아이를 위해 30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책을 읽어주다 보면 목이 ‘컥컥’ 막히기도 하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7살 딸의 어휘력에 감탄하다 보면 기쁨이 고통을 쉽게 이긴다.
“이제는 조금 더 일찍 TV를 끄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마저 느낀다.”
영상이 없으니 가족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늘었고, 더 자주 밖으로 나간다. 다양한 추억을 쌓아가며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본다. 영상을 보며 홀로 영어를 깨우쳤다는 어느 영재의 기적과도 같은 사연을 접하면 아주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아이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지금 이대로의 삶에 충분히 만족한다.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안방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면 부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핀다. 물론 “아빠, 또 하자”가 백 번씩 이어지다 보면 지치기도 하지만 다행히 즐거움이 피로를 이기는 경우가 더 많다.
“어린 딸은 TV가 꺼져 있으니 하루 종일 분주하다.”
집에 있을 때아이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빠, 같이 놀아줘”다. 두 번째로 많이 듣는 말은 “아빠, 책 읽어줘”이고, 그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이 내게는 가장 인상적이다. 어느덧 불혹이 넘은 아빠는 이 말이 듣고 싶어 스마트폰 대신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딸이 내게 세 번째로 많이 하는 말은 바로 “아빠, 사랑해”다. 들을 때마다 귀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어서 종종 귀가 잘 붙어 있는지 만져보며 확인한다. 작은 손을 모아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말해줄 때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까지 든다. 이제는 아이가 자라는 게 5일 연휴의 마지막 날처럼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죠리퐁으로 독서의 재미를 더하는 7살 딸
“헉!그런데아이는 얼마 뒤 진실을 알게 된다.”
아내는 종종 아이 몰래 TV를 시청한다.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내가 실수로 배터리 빼는 것을 잊었고, TV가 켜지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눈이 세 배 더 커졌다. 다시 뽀로로와 춤을 출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아이를 붙잡고 솔직하게 말했다. “서아야, 아빠는 TV를 고쳐도 지금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TV가 켜져 있으면 아빠가 서아 대신 TV를 더 많이 보니까. 서아는 어때? 아빠보다 TV가 더 좋아?”강한척했지만 두 배속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막지는 못했다. 짧은 정적이 흐른 후 아이가 입을 열었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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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TV가 필요한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였던 것이다. 얼떨결에 ‘뽀로로’를 이긴 아빠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과감히 TV를 끈다. 재방 없는 본방에 집중한다. 매번 느끼지만 역시 직관이 최고다.
비하인드 스토리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간혹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따른다. ‘인간 대 인간’으로 7살 딸을 대하면서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난다. 부녀는 목소리가 커지면 각자의 엄마와 아내에게 달려가 억울함을 고한다. 이 상황이 익숙한 아내는 당황하지 않고 두 아이(?)를 다독인다. 남편을 격려하고 아이를 토닥인다. 아내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샘솟는 순간이다. 어른으로 돌아와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서아를 대하는데, 자기는 어른으로서 아이를 대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니, 아내가 웃으며 화답한다.
“그래서 자기는 서아랑 잘 놀아주는 거야.수준이 같아서.”
흑흑. 동심은 간직하되 나는 어른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잠시 후 기분이 풀린 딸아이가 “아빠, 무궁화 꽃이 하자” 하고 말하며 화해의 손길을 건넨다. 속상함이 남아 있지만 나는 어른이니얼른 감정을 숨긴다. 딸과 눈을 마주치고 “몇 번 할 건데?” 하고 묻는다.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세 번?”이라고 답한다. 동심을 간직한 아빠는 “싫어!” 하고 소리치며 단칼에 제안을 거절한다. 시무룩해진 아이에게 큰 소리로 “다섯 번 할 거야!” 하고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 순간 아이는 깔깔거리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워한다.
<1:1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현장
휴~! 거실이 좁아서 그나마 다행이다.이기면 안 되는 놀이를 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음을 배운다. 딸과 잘 놀아준 부상으로 뱃살이여름휴가를 떠난다.입가에 찾아온 미소는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문다.
“내가 살면서 가장 잘 한 세 가지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TV를 끈 것이다.”
바람을 현실로 만들어 주신 독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인티제의 사랑법> 연재를 종료합니다. 더 좋은 글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