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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Aug 17. 2024

신경외과 병동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병원에서 외롭고 가냘프게 지나간다

아버지의 조직검사 일정은 빠르게 잡혔다. 며칠간 집에 머물렀던 아버지는 조직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날에는 당일 아침까지 연락을 기다리다가, 이윽고 몇 시에 어디로 오라는 문자를 받고서야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일요일 오후 세시의 대학병원은 오롯이 입퇴원 환자의 수속만 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으로는 마치 여행이라도 가는 듯 가득가득 짐을 챙긴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쉴 새 없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정과 결심을 가지고 긴 대기가 있는 수납창구 앞에 모였다.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 본 환자와 보호자들, 언듯 보기에도 이런 큰 병원에 '입원'씩이나 하는 것은 처음인 환자와 보호자도 있다. 아직 이런 입원이 자주 반복되지 않은 환자들일 수록 초조하고 비장한 마음이 옅보인다. 보호자가 나서 환자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반대로 누구보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걱정하는 보호자를 뭐 별일이라도 되는 것이냐고  다그치는 환자들도 있다. 이중 누구가 곧 이곳을 나가게 될지, 아니면 다시는 전처럼 두발로 이곳을 나갈 수 없을지, 아직은 모른다. 모두가 다소의 불안과 다소의 기대로 일요일 오후에 수납창구에 모여있었다.


아버지 역시 화창한 일요일 낮에 병상을 하나 배정받았다. 평상복을 벗고 환자복을 입으니 훌쩍 더 아파보였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동은 신경외과 병동, 어지간한 문제로는 입원할 일이 없는 나락에 가까운 병동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두살 어린, 예순 세 살의 뇌수막종 환자 옆에 자리를 받았다.


아버지 옆자리의 수막종 환자는 병동에서 첫번째로 기억나는 환자다. 그는 하루종일, 한시도 끊임없이

"어머니,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어머니는 친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병원에는 그의 어머니도 부인도 자식도 없었다. 그가 부르는 어머니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간병하는, 건너편의 간병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쉴 새 없이 말했다. 끝없이 말을 거는 그의 수다에 지친 그의 간병인이 자리에 없을 때, 그는 어머니를 목놓아 불렀다.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면, 건너편의 간병인은 '응 여기 있어, 기도할게.'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가 가족이 있다는 것은 수술 전날, 동의를 위해 가족이 와야 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 발을 동동거리는 간호사들을 통해 알았다. 가까스로 연결된 통화 저편의 목소리는 밝은 중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지금 그리고 가고 있고, 차가 막히고 하루종일 일과 아이 때문에 바빳는데, 그만 좀 전화하라고 말했다. 그 전날 수술을 하게된 그가 얼마나 더 애타게 살고 싶다고 외쳤는지, 그녀는 몰랐다. 어머니는 있는지 모르고, 부인과 자식은 있는 그가 죽음에 이르러, 이 곳 6인 병실에서 얼마나 외로웠는지는 옆자리의 내가 알고 그녀는 몰랐다. 그는 혼자 있지 않은지를 계속해서 묻고 찾았다. 한밤중에는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어서 밤새 혼자 외쳤다.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커튼 하나 사이로 옆자리인 나는 다행히도 오랜 병원생활에 익숙해져 그런 소리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잠들 수 있었다. 밤새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라는 외로움이 그리 낮설진 않았다.


그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두번째 환자는 어린아이였다. 뇌종양, 뇌출혈 환자들만 잔뜩 모인 이 병동에서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아빠, 여기 티비가 있어요."


손에 타요 장난감을 들고 있던 그 아이는, 이곳 의사들이 수술을 만번도 넘게 해냈다는 자랑이 끝없이 반복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어린 자식을 둔 환자가 부득이하게 병동까지 아이를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 아이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병동에 나타났다. 여전히 타요 장난감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타요 장난감은 이 병원 지하 1층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세 종류의 장난감 중 하나였다. 크지 않은 이 곳 편의점에는 다른 곳에서는 팔지 않고,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물품들이 몇가지 있다. 예를 들면 병원용 슬리퍼, 빨대가 달린 조악한 물병, 성인용 기저귀 같은 것들이다. 세 종류의 장난감 역시 이곳에 특화된 상품들이다. 처음에는 동네 병원에서, 조금 더 큰 병원을 거쳐,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된 아이들이, 두려운 주삿바늘을 꼽고 눈물 젖은 속눈썹으로 한 두 개의 장난감을 꼭 끌어안아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든 장난감이 그중에서도 좋은 것은 아니라 안타까웠다.


그날 밤, 병실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번 울면 온 동네가 떠나가게 우는 딸아이와 달리, 아픈 아이는 크게 울지 않았다. 다만

"무서워요,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라고 끝없이 말했다. 그 아이는 세 개째의 주삿바늘을 발 등위에 꼽으며, 그저 무섭다고만 말했다. 아이의 팔과 다리에 주사를 놓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종종 채혈실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을 마주하며 잘 알고 있었다. 주사를 놓는 실랑이는 한 시간은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그 아이는 새벽의 MRI실 앞에서 다시 만났다. 새벽의 MRI실은 다음날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를 위한 곳이었다. 새벽 두 시, 아버지의 다음날 수술을 위해 방문한 곳에 그 아이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도 내일 수술장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어른에게 MRI는 그저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아이에게는 다르다. 알지 못하는 공포인 것이다. 엄마 손도 없이 새하얀 통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이는 모르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주사바늘에 질린 아이는 저 하얀 통속에 절대로, 혼자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이는 아빠 품에 매미처럼 안겨, 계속해서 순서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잠이 오는 약을 먹었지만 아직도 잠들지 않는 아이를 안고 보호자는 다시 한차례 순서를 미뤘다. 미뤄진 순서에 아버지가 먼저 들어갔다. 순서를 미룬 그 아이는 그렇게 버티다 결국 잠이 들고, MRI를 찍고, 다음날 수술장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어린 나이에 버거운 흉터를 남기게 되었을지, 아니었을지, 아니면 좀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기억나는 환자는 아버지었다. 아버지는 명량했다. 아버지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무언가를 인지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저 '검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의사는 검사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명량했기에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며칠 우리 집에 있다 왔기 때문에 기분이 더 좋았다. 검사를 마치면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갈거라는 말도 아버지를 즐겁게 했다.


수술 전날밤이 돼서야 분위기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아버지의 머리를 솜씨 없는 당직의가 밀고, 몇 가지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서명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무거웠다. 뇌 수술 이후에는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치명적이고 영구적인 장애, 또는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질문들이 수없이 반복되고, 그 모든 문장을 하나하나 읽을때마다,  내가 '아버지, 네. 하시면 돼요.'라고 말하고, 그럼 아버지는 '네' 라고 대답했다. 밤이 깊어서야, 동의는 끝났고 밤은 무거웠다.


다음날 수술은 몇 시에 시작될지 몰랐지만 금식은 12시부터였다. 문득 이 밤이 아쉬운 나는 병원을 달려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밤 11시 30분에 겨우 찾은 것은 편의점에서 팔다 남은 식은 군고구마였다. 이천 오백원을 주고 사온 식은 군고구마를 멋쩍게 내밀며, '이것밖에는 없네요'라고 말했다. 모두가 잠든 6인실에서 아버지와 나는 가냘픈 침상등 아래에서 식은 군고구마를 먹었다. 늘 그렇듯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고구마가 달다고 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어떤 순간들은 병원에서 지나간다. 태어나는 것도, 아픈 것도, 죽는 것도, 병원에서 일어난다. 기억에 남은 환자들 모두, 그들의 인생에서 더없이 중요했을 순간을 외롭게 지나갔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순간들은 모두가 가냘프고 외로워서 조금씩 가엽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모두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병원에서 외롭고 가냘프게 보낼 것이라는 것을. 새벽의 MRI실 앞에서, 6인실의 침상에서, 금식을 앞둔 자정 무렵의 침상등 아래에서. 이곳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 한 명 한 명에게는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순간들을 병원에서 보낼 것이다.


다음날 수술은 저녁 8시가 돼서야 시작됐다. 수술을 하는 곳은 '수술부'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곳을 '수술부'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에 그곳을 '수술장'이라는 불렀다. 그 표현은 어쩐지 넓은 공간에 잠든 수많은 환자의 침상과 코팅된 바닥 위로 핏물이 그득하게 고여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상은 다소 과장이겠지만, 수술장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들이 있었다. 하나 같이 마취되어 누워있는 환자들은 넓은 대기공간에 차곡차곡 '테트리스 된' 침상 위에 놓여, 1차 대기장소로, 2차 대기장소로, 최종적으로 수술장으로 빨려갔다. 그렇게 아버지도, 내 손이 아닌 '이송팀'의 무전을 받으며 '이송'되어 수술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버지는 조직검사를 받았고, 머리에 길게 호치키스 심을 박고 나왔으며, 집으로 돌아간 뒤에 조직검사 결과를 받았다. 교모세포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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