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들을 헤아렸다
형편없는 아버지의 삶이야 말로, 나의 삶이었다.
버릴 물건을 정리했다. 장례의 가장 마지막은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다. 지난 여름, 아버지가 매일 자고 일어나 밥을 해먹던 집을 정리했다. 그 집은, 아버지가 일 년 반 전 자전거 사고가 나던 그 시간에서 멈춰있었다. 처음 아버지가 다쳤을 때 혹시라도 아버지를 다시 맞이할 일이 있을까 싶어 손대지 않던 습관은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 년 반전의 시간으로 봉인된 그 집의 현관문을 열면, 시간은 얇은 먼지로만 쌓여 있었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곧 들어올 상태로 멈춰있었다.
아버지의 침대, 아버지의 식탁, 아버지의 냉장고, 아버지의 세탁기, 아버지의 가스렌지를 이제는 치워야 했다. 가까운 중고업체는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가져가는 조건으로 매우 적은 가격을 불렀다. 큰 짐을 치우고 나면 작은 짐이 남는다. 작은 짐들은 끝이 없었다. 무언인가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인생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나는 끝없이 무엇인가를 버렸다. 누군가 버리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집은 곧 잡동사니로 가득 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쉽게 버리기 어려웠다. 이제는 더 무엇인가를 모으는 사람은 없고 버리는 사람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앨범이 없다.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나의 돌 사진, 그리고 유치원 입학과 첫 소풍 사진 같은 것들이 모여있는 앨범이 없다. 기억에 그런 앨범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아빠는 엄마를 업고 있었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앨범이 어디 갔는지를 물은 적이 없다. 어린 나는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내가 왜 엄마를 볼 수 없는지 묻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앨범을 묻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 묻지 않는 것은, 그런 비슷한 소리만으로도 어른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속상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습관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 것. 내가 어릴 땐 밥을 잘 먹었는지, 어떤 반찬을 좋아했는지, 어떤 놀이를 좋아했는지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기에 나는 사주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난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는 나의 출생일을 기록했지만 시간은 기록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내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를 묻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누군가 기억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아픈 몸으로 나에게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내가 태어난 시간을 기억할 만큼의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묻지 못한 채 모두 죽었다. 더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 짐을 정리하다 뜻밖의 물건을 찾았다. 대전시 중구 은행동의 방소아과의원에서 제작한 아기수첩이었다. 아기 이름에는 '한여름'이라고 쓰여있었다. 1985년 12월 25일 오전 7시 35분에 내가 태어났다. 38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시간을 알았다.
뜻밖이었다. 이 쪽방에서 저 쪽방으로, 저 반지하에서 이 반지하로, 저 달농네에서 이 달농네로, 보잘것없는 이삿짐을 혼자서 꾸리는 중에 아버지가 1985년의 나의 출생 수첩을 아무도 모르게 평생을 가지고 다닌 줄을 몰랐다. 그는 그것을 끝끝내 죽을 때까지, 한 번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서 중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생애에서 가장 나와 오래 함께 산 사람은 누나였고, 어린 나에게 밥을 먹인 건 할머니였다. 고모들과 작은어머니는 내가 입을 몇 안 되는 옷가지와 간식들을 사주었다. 아버지는 늘 말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곧 버젓한 책장이 있는 집과 컴퓨터를 사줄 것처럼 말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장이 딸린 책상은 없었다. 아버지가 가지지 못한 것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아버지가 가진 작은 것은 귀하고 대단한 것으로 말하는 아버지는, 취업 후 내가 사드리는 밥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아버지가 농사지어주는 거친 나물이나 과일들은 대단한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나였다. 내가 사드리는 밥은 대단한 것으로, 아버지가 해놓은 오징어볶음이나 오뎅국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알았다. 아버지가 해놓은 오징어볶음이나 오뎅국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했다. 늦게 알았다. 아버지가 쪽방의 수돗가에서 나와 누나를 붙잡아 씻기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남보다 못하였더라도 남보다 어려운 일이었음. 그리고 또 알았다. 끝없는 행성여행자인 내가, 어디에도 뿌리가 없는 내가, 끝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흩뿌리고 떠돌 때에도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었던 것은 아버지 뿐이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살던 어둡고 축축한 서울 어디의 쪽방에서 아버지가 끓여준 오뎅국을 먹었을 때 행복했고, 그 순간이 즐거웠으며, 그것이 즐거웠던 내가 진짜 나이고, 그것에만 오로지 나의 진실함이 남아있는데, 그것을 말로 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존재로써 내 삶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도대체 아빠였다는 것을 나는 늦게 알았다. 형편없는 아버지의 삶이야 말로, 나의 삶이었다.
그는 고생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삶을 오롯이 나와 누나를 키우는데 다 썼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기수첩'을 끌어안고 우주를 다녀왔다. 없을 것 같았던 나의 우주였다. 내 딸과 마찬가지로 나도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소중했고, 누군가는 그 순간을 평생을 간직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아버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있다. 이 글에도 너무나 불필요한 말들만 많이 있다. 정말로 진실된 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데 이 글은 또 세상에 얼마나 많은 불필요를 더하는 것일까. 아무리 말해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버지는 가지고 갔다. 나는 그것들 중에 일부를 간직하다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보낼 것이다. 그중에 아주 일부는 흔적처럼 남아있다가 이윽고 그것도 사라질 것이다. 죽는 아버지 곁에 누워 나는 수없이 수많은 다른 밤들로 왔다 갔다 했다. 아버지는 없어서 많은 글들을 적었다. 아버지가 있는 한, 필요가 없는 말들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나는 글로 적고, 글과 함께 나는 어린 밤들을 헤아렸다. 엄마와 아빠와 작은 방과 수돗가와 김밥과 병실 속에 헤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