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우내 Mar 19. 2024

내일 모레 서른이지만 이직 갈기기


이직에 앞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

첫 번째, 엄마의 반대 이겨내기

이게 가장 큰 어려운 장벽이었다. 병원을 다니면서도 퇴근 후 직장인반으로 학원이라도 다니며 이직 준비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더랜다. 시간 세이브를 위해서였다. 내 체력은 갈려나가겠지만, 돈을 벌고 있을 때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일 숨가쁜 일상에 집에 들어가면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잠들기 바빴다. 변명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아빠도 안 계신 마당에 엄마는 연년생 두 자매를 묵묵히 키워내셨다. 그것도 엄마 말마따나 남들 부모 둘 다 있는 집에서도 다 받는다는 학자금 대출은 받지도 않고서. 이유인 즉슨, 우리에게 시작부터 빚과 함께 시작하게 두고 싶지 않으셨단다. 참 우리 엄마다운 생각이다. 엄마는 평생을 가난한 집에서 막내로 자라 알뜰살뜰 돈을 모아온 자수성가형 인간이었다. 희생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너무 물러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한 아빠와 반대로 엄마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내 집 마련.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인 8살 때부터 일하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꼬박 20여년을 일하면서 엄마는 목표를 이루었고, 그보다 더한 목표까지 달성했다. 더불어 나와 언니의 등록금까지 다 대 주셨다. 대학교 4년, 청년채움으로 일한 3년을 합치면 7년의 시간이다. 나의 20대의 모든 것을 갈아넣은 직업을 때려치고 디자인으로, 그것도 신입으로 이직하겠다고 하니 엄마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긴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바로 반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사실 그것도 네 인생이니 네 마음 앞서는 대로 그냥 두려고 했다가도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린 거라고 하셨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하는 말인 건 알지만... 참고로 우리 엄마는 K-전라디언이다.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다. 덕분에 난 엄마랑 얘기할 때마다 항상 눈물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항상 우느라 내 말의 요지가 흐려져 내용 전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번 돌이켜보면 후회스럽고 너무 싫어 최대한 마음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말하기 위해 여기저기 제대로 알아보게 된 것이다. 국비지원... 국비지원 외에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디자인 업계에서 UIUX의 미래전망은 어떠한지. 내가 이 직업을 선택했을 때 어디에서 일하고, 취준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세하게 머리에 그려놓고 드디어 엄마에게 말을 꺼낼 날이 다가왔다. 



"엄마, 잠깐만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쇼파 앞 식탁에 앉아 엄마에게 앞에 있는 종이에 낙서를 끄적이며 나의 계획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단은 엄마에게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직무와 완전히 무관한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내가 하려는 직업이 오스템 홈페이지에서 본 직업군임을 설명하며, 목표는 오스템 임플란트에 디자이너로 입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 전 직업이 치과위생사니 그 업계에서 나는 메리트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문직이지만 디자인을 할 줄 아는 인재가 몇이나 있겠냐며. 병원을 다니며 내가 병원이 된 것 같다는 말도 잊지 않고.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병원에서 일할 때 업무량이 너무 많아 내 몸이 다 망가졌었다. 병원에 다니지만 병원 신세를 져야만 하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매일 벌어졌다. 환자가 너무 많아 일이 바빴던 날에는 바로 두 층 위에 있는 한의원도 가지 못해 끙끙 앓으면서 잠들었었다. 어깨가 너무 아파 울면서 뒤척인 날도 많았다. 엄마도 그 부분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은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매일 밤 안마기를 급하게 찾고 다리에도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고, 매일 얼굴도장을 찍는 한의원에서 얻어온 부항자국을 봤을 테니까. 당시 힘들었던 게 생각나 울컥해 울먹이며 말하다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내 의견을 정확하게 피력했다. 엄마는 내가 언제는 뭘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궁금해할 사람이었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 위해 국비지원 방향성을 말하고, 개발자 직군 등 여러가지 직업군을 다 찾아봤는데 역시 내가 원하는 디자인 업무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주절주절 늘여놓으니 엄마는 내 말을 몇 번 잘라먹고 반박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셨다.


퉁퉁 부은 눈이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한 마디를 덧붙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엄마, 내 친구 중에 서울 사는 친구가 있는데."

"서울 사는 친구? 누구."

"그 친구한테 지금 내 상황 설명했더니 내가 알아본 학원이랑 본인 집 가까운데 자기네 집에서 같이 지내는 건 어떠냐고 그러네."

"갑자기 뭔 소리야, 그게."






어쩌면 이게 가장 높은 산일 수도 있다.



이전 02화 직업의 귀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