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라는 뻔한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나의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만 하기에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색연필, 포스터 물감과 친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림 그리는 자체를 정말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른들한테 칭찬받을 수 있으니까. 나의 유년 시절부터 늘상 함께 했던 친언니는 야무지고 싹싹한, 말 그대로 귀염 받는 어린이 그 자체였다. 우리는 자매였지만 전혀 닮지 않았고 간혹 형제라고 말하기 전까진 아무도 우리가 자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년생 자매는 여느 자매처럼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는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덕분에 학창 시절의 반절을 항상 언니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 언니를 이길 수 없었다. 아직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유치원 웅변대회 사건을 떠올려 보도록 하겠다.
난 부모님의 맞벌이 때문에 5살부터 유치원을 다녔다. 당시 발표회를 대신해 동화를 읊는 웅변대회가 열렸다. 5살짜리에게는 웅변대회라는 개념 조차 없었고 (물론 연습은 했겠지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무대에 올려진 나는 밑에서 쉼없이 내게 입모양을 벙긋대던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장내는 너무 조용했고, 그 숨막히는 정적에 우왕좌왕하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무대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게 내 인생의 첫 번째 흑역사다. 그에 반해 언니는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명랑하고 쾌활한 말투로 손동작까지 곁들어가면서 멋지게 웅변을 마치고 내려왔더랜다. 부모님은 언니가 기특하다며 엉덩이를 토닥여 주셨고,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는 와중에도 엄마에게 예쁨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후 언니와 나의 격차는 조금씩 벌어졌다. 난 공부 머리는 초등학교 이후로 일찍이 포기했었고 (초등학생 때 쉽게 받는다는 수학 100점은 6학년 마지막 시험에서 받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수학과는 담을 쌓았다. 사춘기였던 나는 학교에서는 매우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숫기가 없어 남자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어려웠다. 언니는 워낙에 성격이 좋아 주변에 남자, 여자할 것 없이 친구도 많고 공부 또한 어렵지 않게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성적이던 난 언니의 남사친들이 날 알아보고 닮지 않았다며 놀릴 것 같아 어린 마음에 주눅이 들어 언니를 모른 척하고 지냈다. 우연히 2학년 때 언니가 앞반, 내가 뒷반이라 같은 층을 쓰게 된 적이 있는데 화장실에서 언니를 마주치더라도 절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언니의 인기 때문에 나의 학교 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이 언니에게 쏠린 와중에 엄마나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도구는 바로 그림이었다. 교내 미술대회에 나가 어렵지 않게 상을 타고 미술 시간에 받는 점수는 대부분은 '수' 였기 때문에 그림에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교내 대회에서 운이 좋으면 문화상품권도 탈 수 있어서 나름 쏠쏠하게 재미도 봤다. 무엇보다 교내 상이라니, 엄마는 기특하다며 해 준 엄마의 칭찬이 내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마 그 때부터 언니와 겨룰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그림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보통 초등학교 때 진행하는 '나의 꿈 적기' 와 같이 꿈을 적는 칸에 나는 망설임 없이 1순위로 화가를 적어서 냈다. 화가라고 하면 밥 아저씨처럼 붓을 슥슥 갖다대면 호수를 만드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꿈은 점차 구체화되어갔다. 중학교 때는 만화가였다가 고등학교 땐 디자이너가 되었다. 어릴 때 정한 꿈 덕분인지 다른 친구들이 진로 선택으로 고생할 때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고2가 되면 엄마가 미술학원을 보내 준다고 했기에 그 말을 믿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유명한 브랜드 학원인 C&C를 다니다가 아빠의 암을 발견하며 나의 꿈은 잠시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내내 나는 예체능, 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 이름 아래 죄책감 없이 수포자의 길을 걸었고, 언,외,사만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3개만 잘 나와도 인서울은 한다는 게 미대 입시에서 통용되던 말이었다. 그 길로 고1부터 미술부에 들어가 축제 땐 미술부 활동을 하고 학생회 활동을 겸하면서 나름대로의 대외활동도 쌓아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원은 다니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시작해야 하는데, 매번 되뇌였지만 도무지 그 집안 분위기에 미술 학원을 보내 달라 할 자신이 없었다. 고2 겨울방학이 됐을 때도 걱정은 했지만 나의 미래를 의심하진 않았다. 화통을 매고 캠퍼스를 거니는 미대생이 되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3, 봄이 시작되자마자 시작되는 새 학기, 교실의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그 압도되는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입시를 시작했다. 학원에 가니 다른 친구들은 늦으면 3년, 빠르면 4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던 친구들이었다. 이제 막 소묘와 도형을 그리고 있는 내가 그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3월부터 시작해 8-9월이 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여름 특강도 듣고 노력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중간에 미술학원에서 열리는 실기대회에 나가서야 알았다. 이미 너무 늦었고 미대는 정말 가망이 없겠구나 라는 걸. 그럼에도 난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어떻게든 미대를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설마 하면서, 그렇게 믿고자 했다.
수시 접수 기간이 도래했다. 엄마는 내게 이런 상황에서 미대는 보내기 어려울 것 같다며 수시 원서의 반은 엄마가 원하는 보건계열을, 나머지 반은 네가 원하는 미대를 적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엄마가 제안한 이유를 알고 있다.
1. 미대 나와서 뭐로 밥 벌어 먹고 살 건데?
2. 그건 취미로 하면 안 될까?
3. 지금 우리 형편이 미대 보낼 여건이 안 돼.
이 3가지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든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직도 이 순간의 후회가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다 미대로 넣어볼걸. 6개 중 무려 3개를 내 꿈과 관련없는 학과를 넣어야 한다니, 마음이 쓰렸다. 그러면서도 6개 모두를 미대에 넣지 않은 건, 나 또한 자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이상보단 현실을 좇아야 하는 순간,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겠구나 라는 절망감이 내 안에서 갈등했다.
19년의 미자 시절에 느꼈던 공포 중 단연 가장 큰 공포는 '이러다가 대학도 못 가는 거 아닌가.' '재수해서 남들보다 늦어지면 어쩌지?' 라는 고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불러온 현실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첫째인 언니는 일찌감치 자신의 꿈을 접고 치위생학과에 진학해 잘 적응했다.과대까지 도맡아가며 성적 장학금을 받는가 하면 교수님으로부터 이어지는 칭찬에 엄마 또한 안심한 듯 보였다. 불현듯 내가 대학교를 미대로 진학하게 된다면 엄마가 슬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모든 불안에 근거했으리라. 응원해 주지 않는 꿈이라 쉽게 포기한 것이라고 변명처럼 들려도 소용없다. 집안 어디에도 내 꿈인 미대 진학을 응원하는 건 없었다. 그 사실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세상에 내가 제일 불안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미대 진학을 준비하기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며, 내가 미대를 못 가게 된다면 그건 다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다. 차마 아빠의 투병 생활에 함께 고생한 엄마를 미워할 자신은 없었나 보다.
미루고 미루던 끝에 미대 3곳과 보건계열 3곳을 넣었다. 미대는 인테리어 디자인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실내디자인학과로 넣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보건계열은 물리치료학과, 치위생학과, 방사선학과로 넣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건계열은 수학을 포기한 덕에 거의 충청도 부근까지도 광활하게 지원했으며 심지어 치위생학과는 친언니가 다니는 학교로 넣었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미대는 가겠지. 학교 붙겠지, 라는 생각은 줄곧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를 일이다.
면접 일정에 맞춰 엄마의 친구분의 차를 타고 함께 면접을 보러 다녔다. 당시의 나는 덜 익은 감처럼 떨떠름한 얼굴로 보건계열 면접장을 들락거렸다.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었다. 와중에 심지어 덜컥 붙으면 어쩌지? 라는 고민도 심심치 않게 했다. 미대는 실기 시험을 보러 다녔기 때문에 항상 화통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실기시험 및 경험 미숙으로 스케치가 끝나고 물감을 쓰려 붓을 빨아 팔레트에 붓을 갖다대는 그 시점, 정확히 그때부터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었다. 긴장으로 인해 색은 점차 탁해지고, 덩달아 나의 미래도 탁해지고 있었다. 꿈은 내 손에서 차츰 멀어져갔고, 난 모든 미대 진학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실기 후 학원에서 재현작을 그리라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고작 6개월로 이 험난한 미대 입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냐고, 앞에 놓인 화지가 실기장마다 주어지는 종이들과 오버랩 되어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종이 대신 내가 울었다. 울어서 해결될 일도 없는데 말이다.
기대와는 달리 보건계열에서도 한 학교를 제외한 모든 결과가 낙방했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학교는 예비 9번. 난 앞에 있는 8명의 입시생이 제발 이 학교를 포기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붙은 학교는 운명의 장난 같게도 언니네 학교였다. 암담한 현실에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하필, 하필 치위생학과라니. 머리가 아파왔다. 나 진짜 잘할 수 있을까. 그 생각보다도 4년 내내 공부할 생각에 더 슬펐던 것 같다. 내가 원하던 캠퍼스 라이프가 아니었다. 화통을 매고 야작을 하며 치킨을 시켜먹고 밤샘 작업 와중에도 동기들과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작업실이 아니라 독서실 책상에서 국시를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 게 너무 슬펐다. 그렇게 까만 밤이 새하얗게 새도록 내내 이불을 덮고 숨죽여 울었다.
시간이 흘러 3월, 그렇게 난 치위생학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