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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25. 2024

눈 뜨고 보니 독립

내 인생 찾아 삼만리





엄마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나를 쏘아보고 있다. 역시나 예상한 반응이긴 하다. 우리 집은 은근한 암묵적인 규율 같은 게 있었는데 독립이 약간 그런 거였다. 독립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나이 다 들면 너네도 나가 살아라. 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뭐랄까. 독립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건 결혼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결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앞서 말한 전제로는 독립을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집에서 알아주는 걱정인형이다. 자식 걱정은 사서라도 하는 대표적인 어머니의 심볼 같은 사람이랄까. 물론 내가 엄마에게 뱉은 폭탄발언이 연달아 있으니 엄마의 반응이 이럴 법도 하다. 친구랑 얘기를 나눌 때도 서로 걱정하긴 했다. 내 친구도 우리 엄마의 성격을 익히 들어온 바, 일이 어그러지는 건 고사하고 혹여라도 간담 서늘한 전화라도 받는 게 아닐까 고민이었던 것. 내 생명의 은인인 이 친구에 대해선 나중에 천천히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자, 다시 돌아와서 상황을 직면해 보자. 





"그게 무슨 말이냐고. 친구 누구?"







거실이 엄마의 냉랭한 목소리로 한기가 도는 듯했다. 어우, 추워. 뭐라고 엄마를 요리조리 구워삶아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도 말을 골라내느라 혼났다. 우리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걱정이 걱정을 낳지 않을 상황,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 정도다. 그 부분을 공략해 보자. 






"J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대학원이 신촌 근처잖아. 엄마한테 아까 말했던 그 학원이 강남점, 홍대점 두 개가 있는데 원래는 집에서 광역버스 타고 다니면서 강남점 다니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알바를 한다고 해도 여기보단 서울이 더 시급이 세기도 하고, 친구가 자기 혼자 살기 너무 무섭다고 같이 살자고 제안해서. 물론, 걔네 부모님은 ok 하셨어."





물론 거짓말이다. (나 또한 내 입에서 이렇게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것에 대해 몹시 놀랐다.) J네 부모님은 친구인 나랑 사는 걸 아예 알지도 못하신다. J도 혼자 살기는 무서운데 친구랑 같이 산다고 말하면 보증금이며 월세며 완벽하게 반반 나누자고 할 부모님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대책 없는 두 젊은 청춘들끼리 내린 결론은 무모하고 재미있었다. 너무나 고맙게도 J는 내게 월세 한 푼도 받지 않고 나를 거두겠다고 제안한 것. (J도 부모님께서 월세를 지원해 주고 계셔서 자기는 아무렴 상관없다고 했다. 하하.) 





"걔네 부모님이 뭘 어떻게 ok를 해. 남이 자기 자식이랑 산다고 한 건데. 월세 나누고 말고 얘기를 아예 안 하셨대?"







윽, 크리티컬한 데미지를 입을 수도 있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아야 한다. 조용하고 차분한 거실의 분위기와 달리 내 머릿속은 자꾸만 생기는 비상상황을 수습하느라 아주 바쁘다. 다음 말로 받아치기 위해, 또 엄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낸다.







"내가 내 상황 설명했더니 돈보다도 딸이 혼자 사는 게 무섭다고 하니까 그냥 알겠다고 하셨나 봐. 나중에 나 취직하거나 하면 그때 가서 월세 반띵은 생각해 보자고 하셨어. J네가 그래도 좀 집에 여유가 돼서, 크게 개의치 않으신가 봐. 대신 나도 집안일이나 이런 거 도맡아서 해야지, 뭐."







나의 거짓말이 최대한 들통나지 않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다가 내가 뱉은 담담한 말에 엄마의 태도가 한층 누그러진 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들뜨기 시작했다. 이제 굳히기를 들어가야 한다.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J는 나한테 제안하긴 했는데 엄마한테 우선은 허락 받아야 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걔네 부모님께서도 엄마만 괜찮다고 하면 같이 사는 거 좋다고 하셨대. 아무래도 여자애 혼자 사는 게 좀 걱정스럽긴 하셨나 봐. 집 자체가 1층 3층 출입구 있어서 다 도어락으로 잠겨있긴 한데 그래도 건물 내에 남자애들 살긴 하니까. 지난 번에 어떤 남자애가 술 취해서 J네 도어락 착각해서 누른 이후로 너무 무섭대. 그래도 둘이면 좀 낫잖아. 나도 국비가 아니니까 오히려 뽕을 빼려면 학원에 남아서 포폴도 만들고 할 텐데, 매번 늦게까지 있을 수 없는 것도 좀 걸리고, 알바도 하고 해야 되고. 엄마만 괜찮으면 나가서 지내고 싶어. 어때."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친구에게도 부모님께도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오케이, 잘 넘어갔다...! 진정한 나의 첫 번째 자취생활이 시작을 앞두고 있다. 


물론 대학교 생활에서도 자취를 하긴 했지만, 그건 언니랑 같이 자취를 한 거라 혼자서 자취를 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자취의 기본은 뭐가 됐든 늦게 든 술바람에 흥청망청 술을 퍼먹는 신입생에게 일절 터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이 응당 포함된 것 아닌가. 하지만 엄마보다 더 무서운 호랑이 같은 언니를 이길 수는 없었다. 같은 학교다 보니 (거기다 같은 반 라인이라 직속 선배였다.) 나의 친구들을 다 꿰고 있어 요리조리 빠져나갈 길이 있을 리 만무하고, 술자리마다 언니가 용돈을 지원해 주는 대신 암묵적인 통금 시간이 있을 정도였다. 어기거나 반항할 시, 나의 귀중한 용돈이 끊기거나 엄마의 귀에 나의 행실을 말할 기세였기 때문에 반항할 수 없었다. 거기다 2학년을 제외한 나머지는 언니의 친구들과 집을 쉐어해 같이 썼다. 쓰리룸이나 투룸인 경우엔 월세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언니를 포함한 선배들과의 동침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여러 이유로 당시의 자취 경력은 진정한 자취라고 치기엔 애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독립을 해서 자취를 하고 있구나, 라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의 기회 또한 내게는 혼자 하는 독립된 자취는 아니지만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과 하는 자취가 아닌가. 물론 그래서 더 힘든 점도 있겠지만, 걱정보단 기대가 더 컸다.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마쳤다. 한 달 넘게 알아보느라 손품을 오질라게 팔았던 학원만 완벽하게 등록하면 정말로 준비 끝이다. 어디서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포폴의 퀄리티가 달라진다는 소문이 무성해서,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디자이너는 포폴이 끝이라던데. 잘 해낼 수 있을까. 학원비도 비싸던데... 

엄마의 허락에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또다시 헤쳐나가야 할 거대한 산이 남아있음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기다 무엇보다도 이 자취 생활을 서로의 부모님께 들키지 않고 얼마나 잘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나, 무난한 출발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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