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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26. 2023

밤손님

다가오는 따스함에도 지난겨울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눈부신 녹음과 끈적한 열기에 시달리던 후덥지근한 여름을 지나,
왔다가 간지도 모르는 가을을 잠깐 느낄 새도 없이
사랑해 마지않는 겨울이 됐다.
사계절 중 내겐 가장 성수기인 겨울은, 매년 그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내 곁으로 와서는 여름내 가슴 한편에 숨겨 뒀던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자랑스레 꺼내놓고는 한다. 추위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모습들이 사랑스럽다.


인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색 숨이 꼭 내리는 흰 눈 같다. 깨끗하고 따뜻하고 포근하다.
나는 집 나간 강아지 마냥 11월, 겨울의 시작과 함께
조금 이른 설렘을 가슴에 새기며 이번에도 올해의 첫눈을 기다린다.





일찍이 잠든 사이에 밤새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잔뜩 축축해진 길바닥과 함께 나무에 맺힌 서리가 의심스럽다.

그렇게 올해의 첫눈은 이미 나를 지나쳐갔다는 걸 알았다.
올해는 J와 함께 하는 첫겨울이다.
처음 내리는 첫눈을 함께 맞이하고 싶었던 욕심은 햇살과 함께 녹아버린 지 오래.


추위를 많이 타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 J. 다음번에 얼굴 보면 묻고 싶네.


왜 나 모르는 사이에 얼굴도장만 찍고 간 거야, 너.


“ 못 봐서 아쉬워? ”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작게 웃으며 올려다보는 J에게 아쉬움을 뒤로하며 함박눈이 아니었으니까 한 번은 봐준다며 너스레를 떨었던 11월 말이었다.


왜 눈은 온다는 말만 있을까. 마음 같아선 내가 가고 싶다.
















날씨가 더 추워지길 간절히 바라며,
비 대신 눈이 펑펑 쏟아지길 고대하던 나날. 따뜻한 커피 향에 둘러싸인 틈, 불시에 네가 왔다.


세상이 스노우볼 같다.

스노우볼의 눈처럼 천천히, 그리고 빙글빙글 예쁘게도 나린다.


먼발치서 바라보다가 벅찬 마음에 서둘러 눈에 담았다. 그리고 잊지 않고 스스로와의 올해 겨울의 다짐을 곱씹었다. 천천히 씹어 삼키기 전, 곁에 없는 아쉬움에
 마음을 담아 내 눈에도 잠깐 머물렀던 스노우볼을
 뚱뚱한 말풍선에 실어 보낸다. (To. J)


널 보며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글을 적는다. 올해는 좀 늦는 줄 알았는데.
우람한 풍채의 옆집 강풍 형아랑 같이 오느라 늦었네.


첫눈은 원래 맞는 거야.


짐짓 미련하면서도 지극히 충만해진, 그리고 겨울에만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나만의 낭만을

남들 몰래 패딩 모자 깊숙한 곳에 넣고 뒤집어쓴다.

얼얼해진 귓불을 낭만으로 녹인다. 따뜻하다.


추위에 몸은 굳었지만 마음만은 유연하게 풀어진다.
단시간에 설렘을 먹고 어려진 마음이 말한다.
사람의 발에 치여 본연의 색을 잃기 전에 서둘러 높이 쌓여 줬으면.

쌓인 보드랍고 따뜻한 설익은 눈송이를 그러쥐고 불어나는 설렘처럼 큰 눈덩이로 만들고 싶다.

빙그르르 하면서 몸을 굴리면 어느덧 내 키만 한 눈사람이 완성될 텐데.

아쉬움에 멀건 하늘만 바라봤다.

그래, 그래도 네가 오니 실감이 난다.

정말 겨울이구나.



어느 때엔 왔다 간지도 모를 밤손님인 너를 항상 이렇게 정성스럽게 맞이해야만
올해의 남은 날도 공들여 마무리할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내 겨울이 시작됐다.


반갑다.
예쁘게 보일 정도로만,
모두가 미워하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 잔뜩 머금고 이번 겨울을 빛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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