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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Pie Feb 16. 2023

우리 애는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어요

공부 좀 못한다고, 게임 좀 한다고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학교현장에 있다 보니, 우리 아이가 그저 남들처럼 아침에 학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웃고 떠들다가 와주기만 해도 좋겠다는 부모님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마음에 병이 들어 힘들어하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보다 보면, ‘그깟 공부’란 말이 절로 나옵니다.


공부는 잘하는 아이들보다 못하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수준으로 못하는 아이들도 생각보다 아주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 중에 운동이나 예술에 소질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과목은 다 잘하는데 어느 한두 과목에만 취약한 경우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특정 과목 한두 개쯤 못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경험상 이런 아이들은 보통 마음에 큰 상처 없이 나름 건강하게 지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도 못하는데 달리 잘하는 것도 딱히 없거나, 있다고 해도 주변에서(라고 쓰고 ‘부모로부터’라고 읽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보통 자존감이 매우 낮고 매사에 예민해서 늘 자기 방어적으로 행동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되고, 교사입장에서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 집니다. 그렇게 가정이나 학교에서 점점 스스로 존재감이 없다고 느끼게 되면서 아이의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매사에 더 예민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이런 아이들의 학습습관이나 생활패턴이 좋을 리가 없겠죠. 그러니 제발 이런 아이들에게 부족한 점부터 지적하고 질책하지 마세요. 물론 아이가 이지경에 이르면 어른들 마음이라고 편안할리는 없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게 잔소리를 하고, 생활을 일일이 감시한다고 해서 아이가 대오각성을 하고 잘되는 경우는 저의 17년 교사 생활에서 아직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응급실에 실려와서 의식도 없는 환자에게 의사들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부터 하지는 않잖아요.


아이들도 자기들이 못하는 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너는 도대체 아침마다 왜 이렇게 못 일어나니? 밤에 안 자고 또 뭐 했어?” 하지 마시고 그냥 담백하게 “이제 일어나자!” 해주세요. “어라? 또 딴짓하고 있네! 어떻게 너는 5분도 집중을 못하냐?“ 하지 마시고 ”자, 조금만 더 힘내서 집중하자!“ 라고 말해주세요. 게임 중독이라서 공부를 못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게 엉망이라 게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대신 이런 아이들은 정말로 예외 없이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있더군요. 물론 거짓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리 못하는 아이라도 잘 찾아보면 칭찬할 거리가 몇 개쯤은 분명히 있습니다. 속는 셈 치고 아이에게 칭찬을 시작해 보세요. 아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이제 슬슬 낙제를 걱정하는 아이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저의 방과 후 튜토리얼 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 입장에서는 나름 아주 큰 용기를 내서 오는 겁니다. 일대일로 마주 앉아서 선생에게 자기의 가장 못난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해야 하니까요. 근데 이 녀석들... 책도 안 가져와, 지난 시험지는 잃어버리고, 노트는 거의 백지, 계산기도 없이 그냥 빈손으로 털래털래 오면 선생더러 어쩌라는 건지... 중학생 수준도 안되는데 처음부터 다시 다 가르칠 수도 없고, 휴우...


그런데 이럴 때 선생의 당황하고 짜증 나고 한심해하는 표정을 본 아이들은 두 번 다시 저를 찾지 않습니다. 이럴 때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배우라도 된 듯 미소를 장착하고, 지 수준에 맞는 기초적인 거 한두 개 가르쳐주고선, “오우, 생각보단 괜찮은데!” 라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해주면요 다음 튜토리얼에 또 옵니다. 물론 또 빈손으로요. (사람 쉽게 안 변하죠...) “뭐야, 오늘도 또 아무 준비도 안 해왔어?”라고 한심한 듯 지적하면 다음에 안 옵니다. 근데 모른 척하고 한번 더 가르쳐주고, “얼래? 지난번에 배운 거 안 까먹었네! 가능성 있어!”라고 칭찬해 주면 다음에 또 옵니다. 이번엔 무려 교과서와 노트를 가져오죠. 이쯤 되면 이놈이 수업시간에 딴짓 안 하고 저를 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가끔 질문도 합니다.


이제 이 아이는 낙제는 면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복도에서 저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합니다. 제 눈을 슬슬 피하던 녀석이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게 더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족: 한국만큼 대학 진학에 목숨 거는 사회 분위기가 아닌 캐나다 학교 현장의 이야기이니 이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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