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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생 Aug 19. 2024

당신은 무엇의 노예입니까?

특별함, 돈 그리고 꿈?

우리는 결국, 어떤 것의 노예다

자랑스러운 자유민주주의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왕, 봉건사회, 그리고 계급사회가 무너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진실로 ‘노예’가 없을까? 아니, 정말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일까?

 
형태는 달라졌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돈의 노예’다. 자본가는 돈을 지불하고, 나는 돈을 받고 나의 노동력을, 시간을 지불한다.


물론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회 시스템은 가장 인간답고,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부정하거나,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과거에는 높은 계급, 신분출신이 자유를 보장했기에 '천부인권'이라며 포기했다. 하지만 신과 왕이 사라진 이후, 인간은 자유라는, 욕망 실현이라는 쾌락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돈을 벌기 위해 일정 시간 어딘가 얽매여야 한다. 하지만 탈출구는 있다. 바로 ‘경제적 자유’가 자유행 티켓인 셈이다. 그렇다. 우리 대부분은 '돈의 노예'다. 하지만 돈의 노예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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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케니 아커만이라는 인물은 작중 이런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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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어떤 것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하지만 이를 들어내고 싶지 않아 좋은 포장지를 찾아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허울 좋은 눈속임일 뿐, 사람은 모두 ‘어떤 것의 노예’로써 그것에 종속되어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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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것의 노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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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욕구_자신의 욕망이 남에게 인정받아 그 욕방을 방해받지 않고 표출하고 해결하고 싶은 욕구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점에서  현시대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은 인정에 극단에서 얻을 수 있는 ‘우월감’, ‘선민의식’이라 생각한다.
 
이를 부정하고 싶다면,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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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의 성공보다, 추락에 더 큰 쾌락을 얻는다.
우리는 힘들 때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음에 안도한다.
우린 칭찬에 인색하고 비판, 비난에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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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적어도 당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수를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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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에 감사해라’라는 말에 본질을 파악해 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은 경쟁을 통해 얻은 성취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성적, 대학, 취업, 승진 모두 누군가는 얻을 수 없는 성취물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경쟁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빼앗아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겸손이란,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아 쟁취한 그 트로피의 무게를 느끼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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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도 참, 딱딱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불편하니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가치관 차이’라며 나를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가치관이란 ‘가치에 대한 관점’이다. 가치관 운운할 거면 내 생각을 비판,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내가 가치를 판단하는 관점일 뿐이니까.
 
감성팔이들은  말한다. 개성?, 가치관?, 자존감?,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다. 본질은 내가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예에서 벗어나는 방법

나는 염세주의자다. 그리고 내가 정의한 염세주의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곧, 긍정적인 태도다.’라 말한 바 있다. 그런 내가 아내의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사회적 낙인,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

- 인간실격, 나만의 삶에 이유를 찾지 못한 상실감.
 

그리고 세 번째로 꼽은 우울증의 원인은 우리 모두는 어떤 것에 노예라는 점이다.


나는 물론 '돈의 노예'다. 그렇다면 내 아내는 무엇의 노예였을까.? 아내는 '인정의 노예'였으리라 생각한다.

안타깝지만, 나는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했다. 내 아내도 사회의 기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인정받지 못한 인간은 상실과 허무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노예로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저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우리는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염세주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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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이해하는데 인간실격이나, 데미안, 이방인과 같은 소설책이 도움을 주웠다면, 노예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실존주의’라는 철학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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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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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철학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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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에 대해 무외한이다. 지금도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 부부에게 도움을 주웠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보겠다.
 
작게나마 내가 이해한 실존주의는 네 가지 키워드만 이해하면 쉽다.


첫 번째는 ‘본질’과 ‘실존’이고, 두 번째는 ‘선택’과 ‘책임’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의자의 본질은 사람을 앉게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을 앉게 만드는 의자의 본질이 곧, 의자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실존은 무엇일까? 실존은 의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럼 의자는 본질과 실체 중 무엇이 중요할까? 사람이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의자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비록 이름을 의자라고 지었다 하더라도 의자로서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죠.
 
곧, 사물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의 본질을,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없다. 생명체는 생존이 곧, 본질이라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존재 이유를 생존이라 단정 지을 것이라면 과학이지 철학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실존주의는 인간은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고 말한다. 단, 각 개인의 삶의 이유(= 본질)를 찾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가치 있다고 본다.

어떤 사람의 삶에 이유, 즉 본질이 ‘특별함’이라면 그 사람은 특별함을 위한 선택할 것이고, 그것이 ‘돈’이라면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이유를 위해 충실히 선택할 때, 그리고 그 선택의 본질이 충족될 때, 우리는 ‘행복함’을 느낀다. 그렇게 각자의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며, 그 사람의 본질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언이 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인생은 Birth(탄생)와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다.' 즉,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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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선택을 하기 앞서, 태어남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선택지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이 있음을 받아들여 의미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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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한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자유’롭다는 것이며, 자유롭다는 것은 그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어떤 욕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그 욕망은 삶의 이유이자 본질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니까.

물론 욕망이라고 해서 물욕이나 성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삶에 가치관이 곧 욕망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가치관의 욕망을 위해 선택하며 행동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실존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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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장 폴 사르트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 또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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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 요조, 아니 다자이 오사무가 삶에 끝에서 신에게 소리쳤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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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묻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무저항은 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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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뢰와 무저항은 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그는 삶의 이유와 본질을 찾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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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유, 본질을 찾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발가벗은 나 자신과 수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결론지어야 한다. 그게 존재하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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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육을 통해 배워야 했다. 나도, 아내도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문과, 이과, 희망대학을 선택하기 이전에 우리는 삶의 이유를, 가치관을 형성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 자신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돈과 명예, 욕심 없는 삶과 만족하는 삶처럼 사회가 정해 좋은 답안지 중 자신의 환경에 맞게 내 가치관을 강제로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갔다. 그렇게 몇몇은 망가져갔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내 아내도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열악한 환경에 익숙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가치관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학습된 선택들을 돌이키란 쉽지 않다.

아내는 자신에게 솔직했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솔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바 요조처럼, 익살스러운 웃음을 연기하며 살아갔다.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아내는 항상 도전에 대한 동경이, 성취에 대한 갈망이,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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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말했듯.
겁쟁이는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기에,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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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도전을 유보했던 선택은 허무와 상실이라는 책임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신뢰라는 선택은 배신이라는 책임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무저항은 고립이라는 책임으로 돌아왔다.
 
미루고 미뤘던 선택들이 무거운 짐으로 던져졌다. 아내는 너무 무거웠는지 무너졌다.
의학적 진단,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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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사랑, 부부의 본질은 ‘희생’이다.


이미 우리는 부모의 무한한 희생과 사랑을 통해 경험했다. 사랑한다면 우리는 희생할 수 있다.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사랑이라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나는 내 아내의 책임을 나눠 받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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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내 아내는 삶의 이유를 찾고, 그 이유를 검증하기 위해 행동이라는 선택을 도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내 아내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나는 기꺼이 지지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사랑이고, 부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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