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팔이, 성공팔이_책임 없는 조언들
정치적 올바름, PC(political correctness) 주의
인종, 민족, 언어, 종교 성차별 등에 대해서 차별 및 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 주장하는 사회운동.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운동이 있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 ‘PC주의’다.
정치적 올바름의 시작은 분명 차별과 편견을 없애자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이 주장에 우리가 눈살 찌푸릴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사상에서 파생되었던 사회 운동, 영화 그리고 드라마 등에 공감되지 않는다.
지금의 정치적 올바름이 비난받는 이유는 올바름을 내세워 누군가를 추락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간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내 가치를 인정받는 인정요구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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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한다.
내가 더 도덕적인 인간이다.
내가 더 깨어있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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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도덕적이기 때문에 돈이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너희들처럼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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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경제적으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인간적으로 더 우월한 사람이다. 난 잘못되지 않았다. 너희들처럼 돈에 영혼을 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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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는 깨어있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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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저에 깔려있는 열등감은 편견과 차별을 없애자는 소중한 사상을 타락시켰다. 그렇게 경쟁과 성공, 돈과 명예를 얻지 못한 자들이 순수했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사상을 앞세워 누군가를 비난하고 헐뜯고, 끌어내리며,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역설적이게도 갈등을 없애자는 사상은 또 다른 갈등을 만들어 내는 모순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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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다자이 오사무 씨 보고 있습니까? 당신이 말했듯 참 부끄러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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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은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정의로운가?, 당신은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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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라는 말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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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리’란 무엇인가? ‘입장’에 따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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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란, 개인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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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정의란 각 개인이 처해있는 환경, 신념, 입장에 따라 다르다. 정의로움? 말만 그럴싸한 뿐, 내가 처해진 상황에 따라 정의로움 따위는 얼마든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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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각자의 입장에 따라 각자의 도덕이 있다. 서로 다른 경험과 입장의 차이는 갈등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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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를 넘어 공감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희망팔이, 성공팔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우리는 공산주의 그리고 엘리트주의 같은 사회시스템이 편협한 사상이라 생각하겠지만,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정의는 자비 없이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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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가 곧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정의다. 오히려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 공산주의가 제시하는 정의가 더 인간답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언제나 시작은 작고 소중한 소망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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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겪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의 벽이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치이고, 상처 입고, 찌들어 있는 우리에게 달콤한 말들로 가득한 자기 계발, 심리학, 성공학을 필두로 한 성공팔이, 인플루언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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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은 말한다. “넌 너 자체로 소중해.”
그러면서 뭐라는 줄 아나? 너 자체로 소중한데, 그런 너를 인정하지 않고 너의 꿈을 실현시킬 수 없게 만든 사회와 어른들 탓이란다. 내가 소중하니 남 탓하라는 그 태도는 참으로 이기적이다. 네가 존중받고 싶다면 너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위로라는 말은 실패자가 받을 수 있는 특권이지, 실패조차 무서워 가만히 있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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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철은 말한다. “하고 싶은 거 하세요."
그의 말은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기반으로 한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 너도 할 수 있다.”는 말은 듣고 좋을 순 있겠지만 결국, 극소수의 경험일을 대중화시킨다. 그들의 성공이 가치 있는 것은 극소수가 얻을 수 있는 성취의 결과물이다. 대부분 얻을 수 없기네 빛나고 가치있는 것이다. 모두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트로피가 아니란 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 보다 하기 싫은 일을 더 많이 선택해야만 한다. 이들의 책임감 없는 언행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낙인찍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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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결과 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말하지만, 애석하게도 결과가 과정을 결정짓는다. 만약 그들이 성공한 인플루언서라는 결과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말은 패배자의 변명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들이 성공했기에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미화된다. 반대로 실패한 결과는 과정을 더 침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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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이들의 힘든 과정은 아름다운 스토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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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자의 그 과정은 후회와 어리석음으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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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중한 사람인데.. 왜 나를 인정해주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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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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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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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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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에게 내 강의를 들으면 너도 될 수 있다며 성공팔이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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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에게 인플루언서가 감성을 흔드는 연설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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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자본주의에서 가치평가는 철저하게 ‘돈’이 결정한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인간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정의다. 도덕? 윤리? 그런 개념은 자본주의가 내세운 정의 앞에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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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似而非_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하는 고사성어. 단순한 가짜가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진짜인 척하는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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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이비들이 나타난다. 당신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챙기고,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라며 자신을 속이지만 속내는 선민의식이 가득하고, 당신을 속이고 돈을 버는 사이비들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책임 없는 희망이라는 씨앗을 나누어 준다.
씨앗을 받은 사람들의 텃밭은 준비되어 있다.
아무개는 비옥한 땅.
누군가는 시멘트 땅.
어떤 이는 모래밭.
시멘트에 씨앗을 심겠다는 사람에게 씨앗을 파는 사람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시멘트에 씨앗을 심겠다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까?
희망에 중독된 사람들
희망이 주는 기대가 커질수록 뒤따라오는 상실감도 커진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은 포기로 이어진다. 결국, 무분별한 희망의 씨앗은 예기치 못한 상실의 열매를 맺는다. 그렇기에 책임 없이 희망에 씨앗을 뿌리는 것은 생태계를 교란시킬 뿐이다.
희망의 씨앗을 품기 전, 준비해야 할 두 가지 준비물이 있다.
번째는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행동하는 것이다.
_나에게 솔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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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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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본 적이 있는가?
절대군주인 [리어 왕]은 자신의 무지함 때문에 파멸한다. 그의 주변에는 달콤한 말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인간은 늙기 마련, 노년에 세 딸에게 재산을 분배할 시기가 찾아왔을 때. 그는 거짓과 가식만으로 자신을 대했던 첫째와 둘째 딸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 반면, 진실만을 이야기했던 막내딸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절대군주라 하더라도 한낯 인간일 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니, 인간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성취한 성공이 곧, 자신이라 생각했다.
절대군주로 굴림했을지라도 그는, 자신도, 타인도, 그 누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어리석인 인간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는 두 딸에게 배신당해 비참함에 내몰렸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리어 왕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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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들, 내가 누구냐? 너희들이 나를 아느냐? 이 사람은 리어가 아니야. 리어가 이렇게 걷고 이렇게 말을 하더냐? 눈은, 지혜는 어디로 갔지? 내가 깨어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사람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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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이 보는 자신이 중요했다.
물질적인 부가 곧, 자신은 아니다. 반대로 환경의 열악함이 곧, 자신도 아니다.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의탁하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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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질문을 던지는 대신, 답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왜 사람들이 MBTI에 열광할까? 신뢰도나 정확도 혹은 재미 여부를 떠나 나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는 일이 어렵기에 타자가 나를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는 것에 의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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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혈액형이나 MBTI처럼 타인에게 내 자아를 의탁할까? 부끄럽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은 겸손하라는 훈계가 아니다. ‘너의 무지를 먼저 깨달아라’는 말이다. 즉, 스스로 자신을 탐구하는 것은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마주 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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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자.
당신의 이기적임에
당신의 무지함에
당신의 게으름에
당신의 합리화에
당신에 모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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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부끄러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알게 된다.
나라는 인간과 마주할 때. 우리는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다.
즉,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 어엿한 자신이 될 수 있다.
가치관 없이, 나의 기준 없이 함부로 다른이가 제공하는 희망의 씨앗을 마음속에 품지 않길 바란다. 타자의 시선이 당신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두지 말아라.
당신의 기준으로, 당신의 눈으로 평가하고 판단해라.
당신이 원하는 씨앗을 심어라.
_행동하기
가치관을 토대로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면, 싹틔우기 위한 노력과 행동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노력, 인내 등을 운운하며,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들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며, 더 자신을 갈아 넣으라 말한다. 당당하게. 특히 이런 인간들은 스포츠, 예체능, 학업처럼 전통적 가치를 성취한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한다.
그들의 말은 분명 사실이다. 그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말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재능이 중요하다는 의견은 1869년, 행동 유전학의 창시자 갈턴(참고자료-1)에 의해 학술적으로 처음 제시되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재능과 기질, 즉 재능이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의 재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각자의 기질과 성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이롭다 말했다.
반대로 재능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은 1930년, 행동주의의 창시자 왓슨(참고자료-2)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그는 타고남 보다 지속적이고 꾸준히 시간을 투자하는 것, 즉 노력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글래드웰이 제시한 "10,000시간의 법칙", 즉 전문가가 되려면 10,000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 다양한 경험을 통한 재능의 발굴?
- 노력을 통한 자아의 실현?
2018년, 맥나마라 외 연구진(참고자료-3)은 음악, 게임, 스포츠, 공부를 대상으로 투자한 시간 대비 성과율을 비교해 노력과 재능 중에 어떤 것이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그 결과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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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차지하는 비율은 다음과 같다.
게임_74%
음악_79%
스포츠_82%
공부_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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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 재능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는 음악이나 스포츠는 역시 약 80%의 비율로 재능이 노력보다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공부만큼은 재능보다 노력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국민 대부분이 학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학업은 압도적인 비율, 96%가 재능의 영역이라 말한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는 것도,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도 모두 다 재능의 영역란 말이다.
또 다른 노력에 대한 허상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2019년, 알베스 외 연구진(참고자료-4)은 소히 '근력운동은 성장을 방해하고, 농구와 같은 운동은 성장을 촉진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헬스, 축구, 농구가 실제로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연구 결과, 모든 스포츠 운동들은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향을 미치는 정도의 차이도 유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정 스포츠의 선택은 각 개인의 신체조건과 재능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며, 특정 스포츠가 성장에 더 큰 도움을 준다는 근거는 없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해서 농구를 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키가 크니까 농구를 한다는 말이다. 노력이 재능을 추월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질 때. 평범하거나 애매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이 주장이 잔인하게 느껴지는가? 제발 부탁이다. 나는 패배주의에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능이 중요하다는 개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능이 없는데, 노력을 통해 이겨내라며 그들의 청준을 인생을 갈아 넣으라는 책임감 없는 소리를 하지도, 듣지도 말라는 말이다.
당신의 삶에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재능이라는 영역을 인정해라.
당신의 재능을 찾고, 재능의 크기를 느껴보길 바란다.
재능을 찾았다면 가치관에 맞게 그 재능을 활용해라.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에 자신을 던져놓길 바란다. 도전하고, 시도해라. 그리고 맞지 않다면 훌훌 털어버리고 포기해라. 끈기, 노력을 운운하며 당신의 실패와 포기를 비난하는 자들에 말? 들을 필요 없단 말이다.
당신은 재능이 있다. 지금 당신은 그 재능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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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치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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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잘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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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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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싹 틔울 삶이라는 꽃이 궁금합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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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ton, F. (1869). Hereditary genius. London, England: Macmillan. Gardner, H. (1995). “Expert performance: Its structure and acquisition”: Comment. American Psychologist, 50, 802–803. doi:10.1037/0003-066X.50.9.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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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son, J. B. (1930). Behaviorism. New York, NY: W. W. N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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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namara BN, Hambrick DZ, Oswald FL. Deliberate practice and performance in music, games, sports, education, and professions: a meta-analysis. Psychol Sci. 2014 Aug;25(8):1608-18. doi: 10.1177/0956797614535810. Epub 2014 Jul 1. Erratum in: Psychol Sci. 2018 Jul;29(7):1202-1204. doi: 10.1177/0956797618769891. PMID: 24986855.
4.
Alves JG, Alves GV. Effects of physical activity on children’s growth. J Pediatr (Rio J). 2019;95:S72-S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