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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생 Oct 10. 2024

이런 나도 할 수 있는 이야기

아, 나도 우울증이었구나

아, 나도 우울증이었구나

각자의 경험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만든다.’ 앞서 나는 염세주의자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긍정적인 시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지난 수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아내와의 우울증 극복기에 관한 이야기를 [염세주의자가 사랑할 때]에 녹이고 싶었다.


[염세주의자가 사랑할 때]를 1화부터 꾸준히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문득 의문이 들 수 있다.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 초반과 후반부에 주장하는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장에서는 간략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연재 초반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순과 갈등,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비교 경쟁을 통해 엄격한 ‘인간 기준’을 만들어냈다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인간 실격이라는 '사회적 낙인'들이 혐오와 상대적 박탈감이 만연한 지금을, 그리고 내 아내의 우울증을 만들어냈다고 말이다.

그리고 분명, 아내와 분투했던 과정 중에서 나는 '사탕발림 조언들'을 비판했고,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했다.


때문에 나와 솔직하게 마주 보고, 나의 능력과 사회를 인정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벗어나 '나만의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시작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앞서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떠들어대고, 뒤이어 답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탕발림 조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로남불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분명 말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우울증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겪어온 우울증이라는 놈은 의학적인, 현실적인 접근이 도움은커녕 역효과만 더 했다. 우울증을 의학적으로는 '세로토닌 고갈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는 있지만 실제 극심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세로토닌 고갈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질적인 마음의 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적인 관점, 현실적인 조언들을 쏟아내는 그들의 근거와 주장, 그리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 의사와 상담을 했고, 약물치료와 수십만 원짜리 설문지도 몇 번씩 작성했다. 하지만 삶조차 포기하고자 했던 내 아내의 극단적인 무기력함을 전혀 개선시켜 주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아내의 공황장애는 심장기형이 의심될 정도에 기형적인 심장박동을 그려나갔다. 덕분에 응급실, 심장내과, 정신과와 내과 그리고 대학병원을 넘나들며 병원투어를 다녀야만 했다. 면역력은 박살이 났고, 아내의 몸은 하루하루 망가져갔다.

아내는 하루 대부분을 어두운 방에서 누워서 보냈고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했다. 밥은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데, 그마저도 먹으면 항상 위장장애 때문에 소화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 책에서 커튼을 걷고 햇빛을 쬐라는 문구를 보면 어이가 없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누군가는 재야의 숨은 명의를 찾아 여행을 떠나란다.


누군가는 패션우울증이라 조롱한다.

내가 어떻게 이걸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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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삶을 꾸린 부부가 아니다. 보증금 500에 월세 50만 원, 8평짜리 원룸이 우리의 신혼집이었다. 지금도 40년이 되어가는 연립주택의 검은곰팡이가 피어나는 벽지를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시작에서 느껴지듯 우리는 서로의 조건이나,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시작한 커플이 아니었다. 서로 너무 좋아해서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아내는 침대도 없는 방바닥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고, 나는 하루 4-6시간만 자고 일만 해야 했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너무 힘들고 불행하고 슬펐다. 나마저도 무너지면? 내가 쉬고 싶다고 해서 쉬면? 아내와 나는 길거리로 쫓겨나야 한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아프면, 다른 한 사람은 아파도 아프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것도 수년이 지나면 지친다. 포기하고 싶다.

나는 바이크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종종 핸들을 트럭 쪽으로 틀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찾아오는 큰 사고 한 번으로 이 삶이 고통 없이 끝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렇다. 나도 우울증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내가 우울증이면 뭐?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삶의 노예인 나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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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피해자가 된 아내는 극단적인 무력감의 형태로 우울증이 발현되었다.

삶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 혐오로 우울증이 발현되었다.


그렇게 아내의 우울증을 해결하고자 했던 발버둥은 이제는 나를 위한 몸부림이 되었다.





이런 나도 할 수 있는 이야기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몸부림은 수년이 지나자 포기에 영역에 들어갔다. 포기에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그때부터는 삶의 노예이자 일하는 기계가 된다. 신체던, 정신이던 망가질 때까지 그냥 움직이는 고깃덩어리가 나였다.

삶의 불씨가 꺼져갈 때 즈음, 눈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었다. 그 책이 바로 [인간 실격]이었다. 어떤 책인지는 몰랐다. 그냥 책 제목이 나라는 인간과 동일시 되었다. 그렇게 호기심과 씁쓸함이 동시에 들어 나도 모르게 손이 향했다.
 
[인간 실격]을 읽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책을 보며 엉엉 울었다. 30대 남자가 곰팡이 핀 방에서 인간 실격을 읽으며 흐느끼는 모습은 지금생각해도 처참하다고 생각한다.


그 뒤로 나는 자연스럽게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책들을 알게되었다.

 

[데미안], [이방인], [죽은 시인의 사회], [노르웨이 숲]이 대표적인 그것이고, 심취해서 읽어 나갔다. 그리고 위로받았다.

각 작품들 속에서 이야기하는 부조리에 공감되었고, 이를 이겨나가는 혹은 쓰러져가는 주인공을 보며 함께 눈물 흘렸다. 그들만에 삶의 이유가 만들어내는 낭민이, 낭만이 만들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미워서 함께 울고, 웃고, 위로받게 되었다.

물론 책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인생이나, 삶이 직접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문학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몇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읽었던 작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책은 [인간 실격]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위로받기에 좋은 작품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가장 큰 위로를, 가장 큰 부러움을 선사했던 작품은 무엇일까.?


바로 [노르웨이 숲]이었다. 노르웨이 숲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실과 아픔이 있다. 그 상처들로 인해 뭔가 '고장 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들 또한 그들의 삶이 고장 난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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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진솔했고, 사랑했으며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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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마저 사랑하는 그들의 사랑이 질투가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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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의 유대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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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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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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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무엇일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언제나 사랑하겠노라' 함께 선언한 내 아내 말이다.

내가 작품 속에서 질투하고 부러웠던 주인공과 등장인물 모두가 내 아내에게 있었다. 함께 보낸 수많은 순간, 그 순간에 내 아내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줬다.

생각의 변화가 행동에 변화를 이끌고, 끊겼던 대화가 다시금 시작되니, 아내도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같이 서점에 가서 책방 데이트도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둘의 성향이 극과 극이었다. 아내는 내가 고른 책은 우울하다면서 그런 책은 자주 읽으면 오히려 정신건강에 안 좋다고 지적했고, 나는 아내의 책들은 동화책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책에 조금도 관심도, 손길도 주지 않고 있다.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이 되는 것처럼 작은 변화는 점차 아내를, 그리고 나를 변화시켰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컸던 아내는 다시 타인을 통해 상처를 회복하고 있다.

허무주의와 비관론에 정점을 찍던 나는 사랑과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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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어두운 면이 있는 염세주의자지만,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여전히 세상을 고통이라며 일관하는 나지만,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염세주의자 남편과 이상주의자 아내가 만나 고통뿐인 세상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이겨내는 이야기 말이다.

때문에 [염세주의자가 사랑할 때]는 부정 / 분노 / 우울 / 타협 / 수용의 분노의 5단계가 녹아있는 글이다.


아내와 나의 분투에 대해서 과거와 현재의 흐름을 나열하고, 경험과 감정을 섞어 글을 썼다. 그렇게 연재를 이어가니 보니 분노의 5단계의 흐름을 따라 사건이 흘러갔고, 글이 쓰여가게 되었다.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 [염세주의자가 사랑할 때]의 마지막, 수용의 글을 향해 마지막 걸음을 나아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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